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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은 나무 등록일 : 2012-09-12 09:56

무릎 꿇은 나무


민숙에게

가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정직하게 마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숙아. 오늘 오후 내 연구실에 들렀다가 돌아서 가는
너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오늘밤 네게 편지를 쓴다.

민숙아. 사랑하는 나의 제자 민숙아.
한 사람의 삶에서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지난 5년 동안 네가 지나온 길은 그래, 네가 말하듯이
아예 희미한 빛조차 없는 깜깜한 터널이었다.
내가 이제껏 가르친 그 어떤 학생보다도
재능이 뛰어나고 교수들이 이름은 잊어도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통하던 너.
튀지 않으면서도 밝고 명랑하고, 겸손하면서도 똑똑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착해서 늘 친구들을 다독거리던 너.
그래서 네가 졸업하자마자 첫 직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1년 만에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때,
앞으로 네가 살아가야 할 멋진 삶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민숙아, 네가 결혼할 사람이라면서
그 사람과 함께 인사 오던 날을 기억하니.
내가 생각하던 대로 그 사람은 명문대학 출신의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이었고 어디로 보나
완벽한 조건을 갖춘 좋은 신랑감이었다.
그 날이 아마도 8월 중순쯤이었을 거야.
작은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때 옆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도중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더니
돌아가는 선풍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쪽으로 고정시켜 놓는 것이었다.
민숙아, 이상하게도 나는 못내 그 선풍기가 마음에 걸렸다.
자기 쪽으로만 선풍기를 돌리던 그 사람이 왠지 불안했다.
그 사람은 네가 함께 할 자리는 손톱만큼도 허락하지 않은 채
만사에 자기뿐이었고, 결국 네게 상처만 남겼다.
그래서 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선생으로서
원래 공부에 재능과 관심이 있던 너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 발을 헛디뎌 실수한 것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출발선에서 시작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한 번 빗나가기 시작한 삶은 자꾸 엉뚱한 데로만 치달아,
외로웠던 너는 그곳에서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새삼 돌이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경험 끝에
이제 너는 이 넓고 험한 세상에 두 살짜리 아기와 혼자 남았다.
민숙아,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너무나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서 있단다.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이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무릎 꿇고 사는 삶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민숙아,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온갖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나름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며
제각기의 삶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슬픈 선율을, 그리고 또 때로는 기쁘고 행복한 선율을…….

민숙아, 너는 이제 곧 네 몫의 행복으로
더욱더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연습을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이것이 아까 네 뒷모습에 대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민숙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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