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검색

시청자의견 시청자 의견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뛰려 한다더니... 전남의 한심한 한 단편입니다. 등록일 : 2026-03-02 23:37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가 관광지로 뜨니 전남에는 900 여 인이 유배를 왔으니 이것으로 돈벌이를 하자는 멍청한 인사가 있어서 한 자 적습니다.

 

조선의 선비는 열의 아홉이 유배를 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극심한 당파싸움의 결과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형벌은 대명률(大明律)을 계수했는데 대명률의 유형(流刑)은 5백리씩 차이를 두어 2천리, 2천 5백리, 3천리의 3등급으로 나누어 시행했는데, 조선은 도성을 중심으로 100리를 기준으로 시행했습니다. 죄가 가벼우면 경기도 정도였고 죄가 무거우면 멀리 보내는 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배의 적소(謫所)로 단연 많이 쓰였던 곳은 오늘날의 수도권이였습니다. 

 

정약용은 처음 포항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이곳의 환경이 열악하여 국왕이 배려로 외가인 해남윤씨 윤두서가 있는 강진으로 이배(移配)되었습니다. 

노수신은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이배되었습니다.

김굉필은 평안북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이배되었습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남은 주로 이배지(移配地)로 선택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유형(流刑)을 운영할 때 가장 유념했던 것은 유형에 처해진 자가 적소(謫所;유배를 간 곳)에서 주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고위관료가 유형을 가면 2~3년이 지나면 적소를 옮기는 이배(移配)를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이배지(移配地)로서 많이 선택되었던 곳이 전남입니다. 그 이유는 조선임금의 본향이 전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배지(移配地)로 전남을 택한 것은 일종의 " 조선정부의 안전장치 " 입니다.

 

예전에 흑산도에 유배문화공원을 조성한다고 했을 때 이를 백지화할 것을 해당지자체 게시판에 올렸었는데 끝내 이것을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형에 처해진 죄인이 살았던 적소(謫所)는 유형이 끝나면 흔적을 없애서 죄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역죄인이 있었던 흔적이니 지극히 좋지 않은 흔적인 것입니다.

 

또한 원거리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남인(南人) 계열 인사로 노론(老論) 계열이 대부분인 호남의 정치성향과는 반대의 입장에 섰던 인사들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을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하면 향교를 중심학문기관으로 했던 한국 서쪽의 관학파(官學派)와 서원(書院)을 중심교육기관으로 한 한국의 동쪽을 근거지로 하는 사학파(私學派)로 대별할 수 있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처음입니다.  서원은 주자(朱子)라 불리는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 1130~1200)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주요학문으로 하는데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연원을 고구려 경당(扃堂)까지 소급하는 관학인 향교에 대해서 그보다 훨씬 뒤진 1500년 대에 중반에 주로 경상도에서 서원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유는 조선이 건국될 때 삼남지방에서 이를 반대하는 저항이 있었는데, 이때 이태조 대왕이 자신은 전주인(全州人)이라 밝히자 전라도와 충청도는 소요를 멈추었는데 경상도만 계속 저항을 하자 출사를 저지하는 조치를 취해서 경상도에서 관학이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를 개선할 방안으로 민간 주도로 사학(私學)인 서원의 건립이 시작되었는데 조선 후기의 남인(南人)의 근거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연원이 있어서 호남은 원칙적으로 서원이 없고 향교가 성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서울 다음으로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던 전남 장흥도 장흥향교가 교육의 중심이었고 대표적인 과거지향(科擧之鄕)인 나주도 나주향교를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졌습니다. 

호남의 서원의 시작은 김굉필 선생이 순천으로 이배를 온 것이 단초가 되어 훗날 옥천서원(玉川書院)이 세워진 것이었고 여기서부터 호남의 성리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영남에 비해서 호남의 성리학은 흔적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나 연원으로 보나 역사성으로 보나 서원보다는 향교를 먼저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유배의 적소(謫所)는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대역죄인을 잡아둔 좋지 않은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배를 온 인사들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의 고향이며 왕조시대의 여당(與黨)인 노론이 주류였던 호남과는 성향이 달랐던 왕조시대 야당(野黨)이었던 남인(南人) 인사들로 우리 고장과는 인연이 미약한 사람들입니다.

 

왕조시대에도 기피했던 적소(謫所)의 흔적을 현대에 들어서 새로 만들어서 그 흔적으로 돈벌이를 하려는 무뇌아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상고사, 고대사 하나도 올바로 적지 못하는 주제에 못난 짓은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존에 적소(謫所)의 흔적을 마치 유산인 것처럼 해 놓은 지자체는 당장 이를 없앨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상고시대, 고대시대 역대제왕의 고향인 전남을 더럽히려는 행위는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2)
  • 2026-03-02 23:42

  • 2026-03-03 16:36

    유배 문화 자원화와 관련한 시청자님의 의견 잘 확인하였습니다.
    역사적 인물과 지역 유산의 보존 활용 방식에 대한 여러 관점 중 하나로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