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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의 두 시인 등록일 : 2010-06-05 09:52

광양에 사는 10살 딸을 위해 시대적 상황을 자세하고, 최대한 쉽게 쓴 글입니다.

100년전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올해가 2010년이니 그가 죽은 해는 1910년입니다.
너무 너무 슬프고, 찢어지는 가슴을 추체 할 수 없어서 이런 글귀를 적은 후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어려운 세상을 겪으며 흰머리 노년에 이르도록

여러번 목숨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못하였네

오늘은 참으로 어쩔 수 없게 되었네

대체! 100년 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었기에 여러번 죽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는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양고등학교를 지나 동석교 굴다리를 통과하여 직진하다 보면 그가 태어난 집이 사진과 같이 나옵니다.

길이 좁고,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안내표지판이 있는 곳, 길가에 주차 후 걸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조상 할아버지 중에는 유명한 황의 정승이 계십니다.
하지만, 위의 사진에서처럼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는 1855년 조선시대의 겨울에 태어 났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안경을 착용했습니다.

그는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로 말하면, 그가 초등학생시절에 쓴 시를 읽고, 많은 사람이 그 뛰어남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에 학생을 가르치고, 책도 쓰고, 1000개도 넘는 시를 지었고, 그 당시 글을 제일 멋지게 잘 쓰는 사람 3인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그가 22살이 되던 해, 1876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협박하여 강화도 조약이라는,

우리가 많이 손해 보는 불리한 무역약속을 받아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당시는 서양의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 같은 나라들이 좋은 총과 대포 폭탄같은 무기들과 과학적인 도구들을 많이 가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약한 나라들을 공격하여 나라를 빼앗고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 그 당시 조선은 일본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이 먼저 서양 나라들의 과학적인 무기와 뛰어난 점들을 배워 힘을 키우고 나라를 업그레이드 하는 근대화를 했습니다.

일본은 점점 강한 나라가 되어 우리나라를 괴롭혔고, 그에 비해 우리 조선은 힘없는 양 같았습니다.
조선도 서양나라들과 친하게 지내며 힘을 키우려고 했지만, 강한 나라를 만드는 근대화에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뺏으려고만 노리고, 왕의 가족들은 서로 왕이 되려고 싸움만 하고,

대부분의 정치하는 관리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일본사람에게 충성하여 자기의 재산을 늘리는 것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의 정승의 자손인 그는 공부도 잘하여 과거시험을 보면 항상 1등(장원)을 했습니다.

나라에서는 벼슬을 주었지만, 부정직하고, 권력에 눈이 먼 신하들과 같이 있는 게 싫어서, 출세 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하고, 매우 자존심이 강한 대쪽 같은 선비였습니다.
돈과 권력 보다 순수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고향에 있는 그에게 의병장 고광순이 찾아와 격문(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는 홍보문)을 지어달라고 부탁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그날 밤 격문을 썼으나, 고광순이 다시 오지 않아 전해주지 못하였습니다.

곧이어 고광순이 피아골 연곡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가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같이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我曺文字終安用)’하고, 일본이 두려워 격문도 못쓴 자신의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자책하였습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 해 우리의 외교권을

뺏어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그에 나이 51세 때 시를 적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을 듣고서

한강물이 울먹이고 북악산도 찡그리는데
세갓집 벼슬아치들은 예 그대로 노니는구나
동포들이여 청하노니 역대의 간신전을 읽어보오
나라 팔아 먹은 놈치고 나라위해 죽은 이가 없었다오

을사조약장면 (EBS 드라마 중)

일본은 조선을 뺏으려고 자꾸 이런 저런 협상을 맺자고 괴롭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갑오농민전쟁, 을미사변 등등의 흉흉한 전쟁과 전란이 이어지고,

그 때마다 백성들은 더욱 가난하여 지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나라의 위기를 느낀 그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것이 [매천야록]이라는 역사책입니다.

양 같이 연약한 우리나라는 반란이나 전쟁같은 힘든 일만 생기면 다른 나라에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중국에게 도와 달라고 했지만, 일본이 중국과 전쟁하여 중국을 이깁니다.
그러자 러시아에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러시아도 이겨 버렸습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에게 전쟁비용을 주며 도왔지만, 일본을 도운 미국과 영국이 더 강하였습니다.
무능한 우리나라 왕은 일본과 전쟁다운 싸움 한번 못 해 보고, 1910년 그의 나이 56살 되던 해에 일본의 앞잡이가 된 배신자 관리들과 일본 총독이 군인들의 총, 칼 앞에서, 강제로 협상하여 한국은 이제 일본이 되었다는 한일병합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경복궁이라는 우리 왕궁에 일본 국기가 걸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없어 졌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망했다는 이 슬픈 소식이 그에게도 들려 왔을 때, 그는 손님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 하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그는 슬피 목놓아 울다가 준비 해 놓았던 독약을 입에 부어 넣습니다.


목숨이 끊어 지기까지 기나긴 밤, 온몸으로 독이 퍼져 갈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의 몸을 휘감을 때 얼마나 아프고 슬펐을까요?

다음날 새벽! 숨이 끊어지기 전 그를 발견하고 울부짖는 그의 동생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죽기가 참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약사발을 입에서 세번이나 띄어 놓았어. 내가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는가!"

(겁장이 일 수가 있는가!)

한일병합조약(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한지 일주일이 지난 9월 7일 새벽에 일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황현이라는 분입니다.
광양시 백운산 문덕봉 아래에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 선생님의 묘가 있습니다.

매천 황현 선생님은 절명시(목숨을 끊으며 쓴 시) 4수와 아들과 동생에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가히 죽어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단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지 5백 년이 되었는데,

망국의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은 사람이 없다면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는 천성으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을 글을 저버리지 않고 길이 잠들려 하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은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절명시 4 수

- 광양읍 우산공원에 황현 동상 -

한일병합 이후부터 일본군인들이 경찰이 되어 공포 속에서 우리 나라를 다스렸고,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허리에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일본 천왕에게 절을 하라는 신사참배로 종교의 자유도 뺏어가고,

우리 나라의 땅을 다 빼앗고, 책을 만드는 것도, 모이는 것도, 쓰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심지어 이름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농사 지은 쌀과 토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고,

청년과 여자들을 일본 군대로 끌고 갔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

이런 험난한 시기에 또 한명의 시인이 추운 겨울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 출생 중국 간도 명동촌에서,
현재는 연변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동포가 많이 사는 중국에서 태어 나게 된 이유는,
윤동주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함경북도에서 살기가 힘들어 중국 연변으로 이사를 가셨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태어난 생가는 두만강 북쪽 연변, 먼 중국땅 이어서 가려면 시간과 여행경비가 많이 듭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식민지 시절

독립군들이 우리 땅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서, 중국 땅인 만주 연변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히 했던 장소입니다.

- 연변의 위치 - - 윤동주 시인의 생가 - (실제 이정표 바위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매천 황현 선생님처럼 윤동주도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많은 시를 지었고, 12살때 친구들과 함께『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중학교때도 시와 좋은글들을 담은 잡지를 만들었고, 축구선수로 운동도 잘 했습니다.

그는 평생 시를 사랑했지만, 윤동주의 아버지는 동주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셔서 다툼이 많았습니다.
22살 윤동주는 계속 시를 쓰기 위해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대학 기숙사(핀슨홀)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던 2년 후배 정병욱과 아주 깊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선배로서 정병욱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살았습니다.


윤동주는 태어날 때도, 대학을 다닐 때도 평생 나라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과, 일본인들에게 핍박받는 아픔과 서러움이 곳곳에 담겨있습니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길」부분

성경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팔복이 나옵니다.
원래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이지만,

윤동주는 나라없는 우리 민족의 삶이 너무 슬퍼서 한없이 슬프다고만 썼습니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는 슬픔 속에서도 일본에 대한 분노와 독립을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십자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부분

성격이 지나치게 온순하고 겸손했던 윤동주도 친구들이 자신의 시를 보고
"여기를 이렇게 좀 고치는게 어떤가?" 하여도 결코 자신의 시를 수정하여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병욱이 9년으로 된 「별 헤는 밤」이란 시의 "끝이 좀 허전하다."고 말해 주었더니 윤동주는 4줄로 된 10년을 더 추가 하였습니다.

10년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년 그의 나이 25살 때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미국까지도 공격을 감행하는 태평양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윤동주에게는 정병욱와 헤어지는 졸업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졸업을 축하하는 시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병욱은 훗날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꼭 필요한 중요한 책을 만들게 됩니다.)

축 졸업

언니가 떠난다니 마음을랑 두고가오
바람 곧 신(信) 있으니 언제 다시 못 보랴만
이 기쁨 저 시름에 언니 없이 어이 할고
일구사일. 십이. 병욱드림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그 동안 써온 시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의 교수님이 출판을 말렸습니다.

출판 전 일본 관헌들의 검사에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감옥에 갈 것이 뻔 하였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시를 쓸 때 원고지에 적었는데, 이 원고들도 발각되면 큰 일이라서 잘 숨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글을 너무 사랑하는 윤동주가 모든 시를 한글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경찰들이 윤동주와 정병욱이 사는 하숙집을 심하게 감시 해서 이사를 간 적도 있었습니다. - 윤동주의 시 <무서운 시간> 친필 원고 -

출판을 포기한 윤동주는 이 원고를 3개로 만들어서 하나는 가장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님께, 하나는 소중한 친구 정병욱에게,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자기가 가지고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는 자기의 시집을 한 권도 출판 못 해 보고, 일본대학에서 공부하는 중에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글로 시를 쓰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축구 선수를 했던 건강한 29살의 청년이 감옥생활 2년을 버티지 못했던 것은, 일본 731부대가 실험했던 생체 실험용으로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 같은 것을, 몸에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연구하는 생체실험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체를 찾으러 간 윤동주의 아버지는 형무소에서 한국청년 50여 명이 푸른 죄수복을 입고 어떤 주사를 맞기 위해 시약실 앞에 힘없이 쭉 늘어선 모습을 보았다고 했고, 함께 갇혀 있던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를 만났지만, 피골이 상접하여 잘 알아볼 수 없었던 그에게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1945년(29세)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예수님보다 4살 어린 나이에, 예수님처럼 큰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고함 소리를 들은 간수는 한국말을 모르지만, 아마도 그 소리가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었겠나 싶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그때 출판 못 하고 일본으로 가지고 간 윤동주의 원고도 일본 경찰들이 없애 버렸지요.
이렇게 그의 죽음으로 윤동주라는 시인도, 그의 시들도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양하 교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또 하나의 원고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원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정이는 광양제철소의 포스코회사가 운영하는 광양제철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하루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선생님께서 『한빛』이라는 학교 교지에 넣을 시나, 독후감, 편지글, 수필 등을 적어 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정이는 글감이 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명절이면 부모님과 친척 분들이 모여서 항상 하시던 우리집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 났습니다.
그래서 소정이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우리집은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 23번지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집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죽은 윤동주시인의 원고가 내가 사는 집에서 나와 책으로 처음 출판 되었다...... -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본 광양제철고등학교 선생님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온 겨레의 사랑을 받는 윤동주시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우리의 고장인 광양에서 일제식민지를 견뎌 냈다니....."
선생님들은 소정이 집을 현장 탐방 했고, 이 사연을 널리 알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광양지역신문에도 이 소식이 보도 되더니,

이번엔 이성웅 광양시장님께서 소정이의 집을 직접 찾아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소유자이며 정병욱의 외조카였던 아버지 박춘식씨와 윤동주시인의 후손들과,

정병욱의 후손들이 모여 집 이름을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고 지었고,

(*유고 (遺稿) : 죽은 사람이 남긴 작품)

1925년에 건립된 소정이네 집은 2007년 7월3일 등록 문화재 제341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2008년 10월 이 곳에서 <제1회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문화재 등록기념 청소년 백일장과 사생대회>도 열렸습니다.
오래된 집이라서 수리를 하고 현판과 안내판을 새로 걸고, 잘 보존 하려고 매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윤동주를 몰랐고,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을 그 때에,
정병욱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이 윤동주의 자작 자필 원고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에 그에게 다가올 엄청난 위험의 정도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루 하루 일본경찰들의 눈을 피해 자신에게 전해진 원고를 남 몰래 소중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많은 군인들이 필요 해서, 우리 나라의 수많은 청년들을 군대로 끌고 가기 시작 했습니다.
자신도 일본 군대로 끌려 갈 것을 안 정병욱은 원고를 들고 전남 광양에 계셨던 어머니를 찾아 갔습니다.
"어머니! 이 원고는 나중에 우리 나라 문학사에 길이 남을 선배 동주형의 시들이에요. 지금은 이걸 갖고 있는게 위험 천만한 일이지만, 훗날 이 시가 우리 나라에 정신을 살아나게 할 것이니 잘 보관해 주세요. 혹시, 저나 동주형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되면 이 원고를 연의전문(연세대학교)으로 보내어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해 주세요."


정병욱은 이 말을 어머니께 신신당부하고 일본 학생병사로 끌려 갔습니다.
일본 사람들 앞에서 조선 사람들은 파리 목숨 같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부탁한 원고를 딸의 혼수감과 함께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대청마루를 들어 올리고, 땅을 파 흙 속에 묻었습니다.
딸의 이름은 정덕희 이고, 군인으로 끌려간 오빠를 간절히 기다리는 정병욱의 동생입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덕희를 부르시더니 대청마루 밑에 스셨습니다.

덕희는 멀쩡한 마루를 뜯어 올리시는 어머니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파시더니 항아리를 보여 주시며 "이게 뭔지 아니?" 하시고 원고에 대해 설명 해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한글시를 보자 중학생 덕희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갑자기 심장이 멈춰 질 것 같았습니다.

자리에서 꼼짝 할 수 없었고, 온 몸엔 공포스런 소름이 돋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일본 경찰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투옥, 고문, 학살하고 전쟁터와 노예노동일터에 내몰아 죽이고, 심지어 세균무기를 사람실험 대상으로 잡아가는 순사라 부르는 일본 경찰!
우리 한국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이름도 강제로 일본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그 끔찍한 시대에,

윤동주의 『서시』를 본 덕희는 경악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친필 원고>

덕희와 가족들은 하루 하루를 그 대청마루 위에서 누가 일본 순사에게 죽임을 당했고, 누가 잡혀 갔다는 뉴스와 소문을 들으며 살아 갔습니다.

전라북도 부안 남선교통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22살에 최상욱씨는 1943년 5월 친구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한국인 종업원에게 “조선인은 조선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나라가 없어 내 이름을 야마토다마시이로 바꾸었지만 한국인에겐 한국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여 보안법 위반, 불경죄 등으로 징역 2년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광주 28살 이종세씨는 친구들에게 “우리 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것에 반대하고, 독립을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여 2년 6개월을 감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양구군 매동초등학교 홍순창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우리나라가 일본에 빼앗겨서 조상 대대로 사용해온 이름 까지도 바꾸어야만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라고 말했다가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이란 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경상북도 영일군의 22살 이정우는 [전 세계에서 나라가 없는 우리 국민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라는 편지를 선배에게 보냈는데 이일로 일본경찰에 붙들려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전라남도 광주서공립중학교 학생 남정준과 10명의 학생들은 일본인이 한국인을 차별하며 무시한다는 비판의 말을 했다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아 모두 감옥으로 보내 졌습니다.

어머니는 덕희에게 "절대 어디에서도 이 원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큰일 난다."고 말하였지만 덕희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한국사람들이 독립을 이야기 하거나, 일본 욕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과 감시를 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사람들은 친구나 가족들에게도 독립과 일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하기가 무서웠습니다.
일본 경찰들의 끈질긴 감시는 대단하여 유도질문도 하였습니다.
한국사람에게 무척 잘 해주며, 친한 척 하다가 일본에 대한 욕을 하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한국인이 속마음을 보여 일본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면 체포 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라 불리는 광양의 한자락 해안가 덕희네 양조장 가게 대청마루 위,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도 1945년이 되었고.

해방을 6개월 앞둔 2월에 윤동주의 죽음이 들려 왔습니다.
8월15일 우리 나라는 독립되었고, 정병욱은 살아서 망덕포구 바로 앞 길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여 있는 윤동주의 유고 작 원고를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주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정병욱은 1948년 그의 나이 27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윤동주의 시집을

정음사에서 출판했습니다.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며

부산대학교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 정덕희는 집안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부산여고를 다녔습니다.
교사가 모잘랐던 부산여고에

부산대학 정병욱 교수가 강의를 맡기도 했었는데,
덕희는 국어 수업시간 오빠가 윤동주의 시를 칠판에 적어 가르치고는, 창가에서 눈물에 젖어 흐느끼던 오빠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좀 흐른 어느 날,

정병욱 교수는 동생 덕희에게 "윤일주 청년을 만나러 가자."고 하여 덕희는 윤일주를 만났고, 그 후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윤일주는 윤동주 시인의 동생이었으니, 절친 정병욱과 윤동주의 동생들이 1955년 12월 7일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자 정병욱 교수는 그가 지금까지 보관 해 오던 윤동주의 친필 원고를 윤일주와 정덕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윤일주 교수는 형인 윤동주 시인의 다른 친필원고들도 더 모았으며 1985년에 돌아가신 후, 현재는 그의 아들 윤인석 교수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덕희네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윤동주의 원고를 대청마루 밑에 숨겨 일본 경찰의 혹독한 경계의 눈초리를 피했던 망덕포구의 길가 집을, 외종 동생 박영주씨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박영주씨의 손녀가 광양제철고등학교에 다닐때 학교 교지 「한빛」에 기고 했었던 소정이 입니다.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라는 제목에서 호를 따와 백영 이라고 지었고. 1958년 37세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로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극진히 선배 윤동주를 사랑했습니다.

윤동주의 훌륭한 인격을 사랑했고, 윤동주 문학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일제식민지 말기 우리 문학은 암흑기로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들 했지만, 정병욱 교수는 민족 수난기에 윤동주의 문학이야 말로 인간의 자유와 자기 정체성 같은 귀중한 가치를 지키려고 분투했던 레지스땅스(저항) 문학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윤동주를 간직 했고, 윤동주를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윤동주 문학은 우리 국민 독자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우리 시인들 중에서 윤동주가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 가장 뜨겁게 사랑받는 시인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 북쪽 거의 끝 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윤동주 시인을 우리 나라 남쪽 거의 끝인 광양의 망덕포구 길가 작은 집에서 부활시켜,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처럼, 죽은 후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광양시에서 앞으로 더 뭘 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2010.5) 광양의 망덕포구에서 [윤동주 유고 보존 전병욱 가옥]과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시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윤동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내게로와 꽃이 됩니다.

그는 이름을 평소동주(히라누마)로 바꾸었습니다.

창씨개명(일본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해야 일본을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참회록」을 썻고, (* 참회록: 잘못을 반성하는 글)

「별 헤는 밤」 끝부분에도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못 쓰는 서러움을 나타 내고 있습니다.

「별 헤는 밤」8년~10년을 개인적으로 해석 해 봅니다.

8년 -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땅에 윤동주를 썻다가 평소동주가 생각나 지워버렸습니다.

9년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브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평소동주로 창씨개명 할 것을 부끄러워 하며 윤동주는 아침이 올때까지 별을 헤아리며 울고 있습니다.

원래 여기서 끝이었는데 정병욱이 허전다하고 하여 윤동주가 더 써 넣은

10년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러나 내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조국의 독립이 내가 죽더라도 꼭 올 것입니다.

- 詩人尹東柱之墓 시인윤동주지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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