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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굴피집 등록일 : 2010-06-09 10:24

40년 세월 흔적, 굴피집 곳곳에 '가득'

깊은 산 속에서 홀로 굴피집 지키는 정상홍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에서 남쪽으로 뻗쳐 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간다. 사무곡(士武谷)에 홀로 굴피집을 지키고 산다는 정상흥 씨(70)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 오 리쯤 올라가자 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계곡을 따라, 또 하나는 비탈진 산을 향해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해서 이번에는 산 숲에 가린, 길 같지 않은 산길을 타고 오른다. 그렇게 십 리쯤 산을 오르자 8부 능선쯤에서 약간의 평지가 펼쳐지며 굴피집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 있는 굴피집은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에도 잡풀이 돋은 것을 보면 빈 집이 분명하고, 왼편에 자리한 멀쩡한 굴피집이 정씨 노인이 사는 집일 터이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 그저 기가 막힌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인기척을 내며 굴피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이 방문을 빠끔히 열며 내다본다. 정상흥 씨다. 서른 살 때 산 아랫녘에서 이 곳 사무곡으로 올라와 40년 동안 굴피집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아들딸 4남매도 여기서 다 키워 내보내고, 5년 전부터는 이웃도 없이 오로지 혼자 굴피집을 지켜오고 있다.
“여기를 사무곡이라 부르는 까닭이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전에 여 선비들이 마이 살았다고 해 그런가 보우”라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이 곳에는 과거 한문 공부 하던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았다고 한다. 사무곡을 품에 안은 산도 ‘문필봉’(文筆峰)이란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이 곳에는 열댓 집 정도가 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그 때만 해도 이 곳의 집들은 대부분 억새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거나 굴피집이었다. 이들 산중의 두메마을이 없어진 것은 70년대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화전정리사업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도 화전민의 후예인 셈인데,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굴피집은 40년 전 이 곳으로 왔을 때 손수 목수며 미장이가 돼 지은 집이다. 그전에 있던 집은 사방 네 칸짜리 너와집이었지만, 불이 나는 바람에 불 난 자리에 새로 굴피집을 지은 것이란다.


40년 된 굴피집. 사실 굴피집을 지켜간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굴피지붕의 수명이 20년은 된다고 하지만, 수시로 덧덮어 주지 않으면 빗물이 새기 십상이다. “지끔 사람덜은 굴피 이을 줄 몰래 가지구 얼마 전에두 혼자 이거 잇는데 일주일 걸렸다니까네. 이 지붕 이은 지가 5년 됐어요. 5년 넘으니까네 풀이 막 나구, 그래 다시 일 때가 됐지. 메칠 전에 새루 이걸 잇다니까 비가 와서 상긋 안 잇구 있어요. 여긴 함석 같은 거 이으면 안 돼요. 바람이 세나서, 산이 높으니까네, 함석이 다 날아가요.”
굴피지붕의 재료가 되는 굴피를 채피하러 갈 때는 낫과 지게만 있으면 된다. “한 번 껍질 뻬끼구 3년 지나면 속껍질이 이래 나와서 괜찮아요. 뻬낄 때 상하지 않게만 뻬끼면, 생기구, 또 생기구 허니까.” 굴피를 벗길 때 너무 어린 굴참나무는 껍질이 얇아서 못 쓰고, 너무 큰 나무는 억세서 또 못 쓴다고 한다. 적당히 자란 나무라야 껍질도 부드럽고 잘 벗겨진다는 것이다. 굴피를 채피할 때는 처서 이전인 8월 정도에 하는 것이 좋다. 처서가 지나면 물이 안 올라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곳의 굴피집은 두 개의 방과 부엌, 툇마루가 전부인 세 칸짜리 집인데, 마디가 가는 산죽으로 지붕 속을 하고 그 위에 굴피를 여러 겹 덧덮는 방식으로 지붕을 이었다. “이게 추울 것 같지만, 여름에는 선선하구, 겨울에는 들 추워요. 빗물도 안 새구.” 부엌에는 산중의 굴피집이나 너와집에서만 볼 수 있는 화티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화티란 아궁이 옆에 또 다른 작은 아궁이를 만들어 불씨를 보관해 두는 곳인데, 옛날에는 한겨울이면 이 곳에 언제나 불씨를 모아 둬 겨울이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했다.



여름엔 '시원' 겨울엔 '훈훈'
수시로 덧덮어 줘야 빗물 안 새
손수 지은 굴피집서 4남매 키워
옛날에나 쓰던 농기구 등 '그득'
노령에도 굴피 손수 벗겨 작업
홀로 굴피집 지키며 산골 지켜


요즘 보기 드문 굴피집답게 집 안팎에는 옛날에나 볼 수 있었을 도구들도 더러 눈에 띈다. 과거 토끼를 잡을 때 쓰던 덫은 방 안에 들어와 쥐덫으로 쓰이고 있고, 부엌에는 씨앗을 저장하던 바가지 씨오쟁이가, 화장실에는 눈 올 때 신던 설피가 그대로 걸려 있다.
옛날 이 곳에는 약초 밭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땅이 좋아서 약초가 곧잘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도 약초 농사만은 놓지 않았는데, 중국산 약초가 들어오면서 인건비도 건지지 못해 갈아 엎었다고 한다. “황개(황기), 도라지, 더덕, 뭐 이런 거 했지. 교통이 불펜해 그렇지 여게가요, 황개 하면 그래 잘 돼요. 보리, 감자, 옥수수도 잘 되구. 흙이 좋애 가지구, 옛날에는 할아버이덜이 곡석 잘 되니까네 안 내리가구, 밑에 있던 사람덜도 올러오구 그랬어요.”


한때는 토종벌도 꽤 많이 쳤다. 20년 넘게 열댓 통씩 토종벌을 쳐 왔으나, 밭에 약을 잘못 치는 바람에 벌을 잃고는 벌통을 걷어치웠다고 한다.
현재 그는 삼척에 있는 둘째 아들 집과 사무곡에 있는 굴피집을 번갈아 왔다갔다 하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가 맞벌이를 하는 탓에 손주들이나 봐 줄 요량으로 내려가는 것이지만, 그와 평생을 같이 한 할머니도 그 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삼척과 사무곡을 오가기 시작한 작년부터 자연 밭일은 소홀해졌다. 밭일이란 것이 어린 자식 돌보듯 매양 손이 가는 일인 데다 나이 칠십에 밭일 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아직은 십 리 넘는 산을 오르내리고, 두 개씩이나 물통에 가득 물을 채우고 지겟짐을 지는 일 정도는 거뜬히 해낸다.


사실 이 깊은 산중에서 홀로 굴피집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지독한 불편함과의 싸움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등잔불 신세를 져야 한다. 전자제품이라고는 40년 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고작이어서 주먹보다 큰 건전지를 붙여야 겨우 소리가 난다. 우물이 있거나 수도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계곡까지 가서 우물물도 길어 와야 한다.
한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마을 아래까지 내려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옛날에 눈이 마이 올 때는 석자(90㎝)씩이나 와. 눈 오면 산돼지 잡으러 마이 댕기구, 물 길러 갈 때두 살피(설피) 신구 댕기구. 겨우내 낭기(나무) 백 짐은 때요. 그래 하루에 두 짐씩 낭기를 했다니까네. 그 전에는 부인덜이 심이 들었지. 물동이 이구 지구 다니니까네.”


하지만 그렇게 불편하고 외롭게 사는 것이 지겹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편하다고 말한다. “혼차 사는 게 펜해요. 낮에는 가끔 약초 캐러 나가구, 누가 오면 놀구, 날 더우면 쉬구, 저물면 들어와 자구, 혼자 잡곡 먹구, 약초 캐구, 봄에는 두릅 따구, 여름에는 초피 따구, 그렇게 살어요. 전에는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산짐승이 나타나면 울구, 사람이 나타나도 울구, 그래 개가 짖으면 괜히 산짐승이 왔나 겁이 나기도 했는데, 개를 키우지 않으니까 외려 사람이 왔는지 짐승이 왔는지 몰르니까 더 나요.” 그가 사무곡을 아주 떠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숙박은 삼척서 해결

사무곡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릉에서 동해고속도로로 바꿔 탄 뒤, 삼척까지 와서 38번 국도를 이용해 신기면까지 간다. 신기면에서 대평리 들어가는 팻말이 보이면 팻말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 유곡이란 곳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마을에서 시오릿길.

숙박은 삼척까지 나와 해결하는 것이 좋으며, 대이리 민속마을 가는 길에도 잘 데가 더러 있다. 삼척은 우리 나라에서 굴피집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인데, 대이리와 신리 민속마을, 미로면 내미로리에도 굴피집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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