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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유적지 등록일 : 2006-02-15 20:55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조선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육천여 왜군의 포위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거의 만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채만 남았다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르 간직해온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개설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 사적 제349호(91. 3. 30)
-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1
이 곳은 고려 문종(재위 1046∼83년)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만든 거대한 불쌍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식 배치였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1597)대 불타 없어졌다. 오랜세월을 버터온 석탑과 돌 유뮬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경내의 국가지정문화재 : 오층석탑(보물 제 30호), 불상좌대(보물 제 31호), 당간지주(보물 제 32호), 석불입상(보물 제 43호)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은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불법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가 그중 하나이다.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숙종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천왕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부처의 자비를 보이듯 포근히 감싸안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맑고 투명한 반선계곡 물이 속세의 번뇌를 씻어 주려는 듯 절 옆을 돌아 굽이쳐 흐르고 있다. 경내와 부근의 국가지정문화재 : 백장암삼층석탑(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 10호), 삼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수철화상(秀澈和尙)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과 탑비(塔碑)(보물 제33, 제34호), 실상사 석등(石燈; 보물 제 35호), 부도(浮屠; 보물 제 36호), 증각대사(證覺大師) 응료탑(凝蓼塔) 과 탑비(보물 제38, 제39호), 백장암석등(百丈庵石燈; 보물 제40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1호),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0호), 약수암목조탱화(藥水庵 木彫幀畵; 보물 제421호), 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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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날 은하수 오작교를 건너 만나는 사연을 담은 정원이다.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정철이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연못을 파고 반월형 교각 네 개를 이어 오작교를 세웠다. 연못안에는 도교에선 신선이 사는곳으로 일컨느 세 개의 성을 만들었다. 봉래(蓬萊)·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洲)섬에는 작은 정자를 세웠다. 춘향전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이래로 정원 안에 춘향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들어섰다. 광한루원은 정문앞의 하늘빛을 머금은 요천과 그 위를 곡선으로 가르는 승월교와 어우러져 유서 깊은 관광명소로 많은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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