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추천도서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등록일 : 2009-05-22 12:41
강수돌 교수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부전공을 신청해 들은 사학과 강의 중, ‘한국사회경제사’와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강의를 맡으신 교수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솔직히 알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의 저서를 읽은 건 몇 안 된다. 도서관에서 빌려 본《작은 풍요》,《1%의 대한민국(공저)》그리고 이 책《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밖에 없다. 앞서 말한 두 책은 그래도 힘이 덜 들었는데, 이 책은 좀 많이 힘들었다.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리가 안 되는 걸 보니 나는 아직도 멀었나보다.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는 아주 작고 두껍지 않은 녀석이다. 솔직히 좀 만만하게 봤다. 이틀이면 읽어낼 수 있으리라. 웬걸, 크지도 않은 내 코가 완전 뭉개지고 아주 보기 좋게 작살(?)이 났다. 요 조그만 녀석을 거의 한 달 가까이 붙들고 씨름했으니 남들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일지라. 그래도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겠지, 하며 위안을 삼아본다. 장하다 인마!!(ㅡ,.ㅡ*;) 『삶과 일, 가정에 대한 작은 에세이; 2. 일에 대한 가치관』 사실 우리의 현실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bus-stop)’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동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이 되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과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려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이 있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p20)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이런 현상이 알게 모르게 가정을 변화시키고 있음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듯하다. 이런 결과를 낳는 그 과정에는 우리의 ‘일중독현상’이 그 몫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업무에 몰입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함과 동시에 스트레스를 낳는, 이러한 일에 대한 우리의 아이러니한 가치관.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고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우리는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재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스트레스를 재가공하여 우리는 일중독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초래된 결과(일중독현상)의 심각성에 따라서 가정은 조금 ‘덜한’ 버스정류장, 조금 ‘더한’ 버스정류장, ‘심각한’ 버스정류장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 뿐, 맞벌이를 하는 요즘의 추세에서 보면 그리 놀랄만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노동시간이 월등하게 높은 것(어떤 국가와는 거의 2배 가까이 우리가 높다)으로 분석하고 있고, 여러 설문조사에서도 일을 할 때와 일을 통해 어떤 성과를 올렸을 때 대다수가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러니 가정에서 느끼는 행복은 직장에서 업무달성·성취로부터 얻는 행복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행복과 기쁨이란 게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에 비례해 나타난다고 본다면, ‘보금자리’에서 ‘버스정류장’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무책임; 2.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_ 2) 기업의 ‘5D전략’』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회의 압박이 증가한다고 해서 기업들이 진정성을 갖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개 세 가지 전략(‘3D전략’)으로 대처한다. 첫째, 부정(Deny), 둘째, 지연(Delay), 셋째, 지배(Dominate)전략이 그것이다. 먼저, 부정전략이란 기업이 책임질 직접적 대상이나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이다. 상황 자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대개 인과관계를 부정하거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린다. 다음으로 지연전략이란,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나 상황 자체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경우 그 해결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론을 편다. 아직 문제 자체가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거나 그 해결을 위한 역량이 아직 구비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저항세력이 지치게 되거나 세력관계가 뒤바뀌면 포장만 달리하여 자기들의 의도를 관철한다. 끝으로, 지배전략이란, 어차피 부정도 못하고 지연도 못할 조건이라면 문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기업이 장악하려는 것이다. 문제 상황의 규정 자체를 기업에 덜 불리하게 한다거나, 우호적인 학자나 전문가를 초청해서 토론회를 열어 해결방식을 기업에 유리하게 끌고 가는 식이다. 그리하여 ‘전화위복’을 꾀한다. 대단한 위기에 휘말린 기업이 오히려 그 위기를 딛고 더욱 번창하게 되는 것은 지배전략이 효과를 낸 결과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판단으로 나는 위 ‘3D전략’에다가 두 가지를 더 부가해 ‘5D전략’이라 명명한다. 하나는 왜곡(Distort)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사기(Deceive)전략이다. 왜곡전략이란 문제 상황을 비틀어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상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다. 특히 건설이나 개발과 관련된 사례에서 두드러지듯 애초엔 사업 그 자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가부문제로 시작하지만 대개 끝은 보상문제로 귀착한다. 다음으로 사기전략이란 전문가회의 등을 통해 형식적 민주주의는 준수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뇌물, 감투, 암약 등을 통해 대 사회적 사기를 치는 것이다. 서류조작, 자료조작, 통계조작, 수치조작이 기본이다.(p70~p72) 위와 같은 기업의 ‘전략’에 관해서 저자는 태안 앞바다에서 있은 기름유출사고와 충남 연기군 신행정수도이전에 관한 사례 등을 가지고 상세하게 분석·설명을 하고 있다. 너무 순진한 물음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잘못을 했거나 실수를 저질러 놓고는 저런 추악한 짓을 해가면서 모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경영학 강의와 기업윤리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회적 책임이란 것을 학교에서는 마치 대단한 선행을 한 것처럼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했던 것 같다. 사회적 무책임에 관한 사례분석은 결론적으로 오직 기업의 이윤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귀결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한 강의를 들은 것 같아 후회가 막심하다. 물론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당한 수단과 방법으로 올바른 과정으로부터 얻어지는 이윤을 기본 전제로 한다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역겨운 냄새가 진동한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요나 압박에 못 이겨 하는 척이라도 하는 놈(?)들은 그나마 양반이고, 왜 내가 힘들여 장사한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날뛰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격이고, 더 어리석은 것은 우리 다 굶어죽고 나면 지네가 말하는 경쟁력이다 생산력이다 하는 것을 어디에다 팔아먹을 심산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돈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며, 언제까지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때울 작정인지. 스스로 저지르거나 실수로 발생한 잘못에 대해서만큼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하는 걸 가지고 그런 것까지 기업경영의 ‘위기상황’이라는 원론적인 틀에 넣고서 스스로 자초한 위기가 아닌 그저 예상치 못한 ‘발생한 위기’로 치환하여 어떻게든 손해를 최소화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게 참 안타깝고 어리석을 따름이다. 차라리 무책임하면서 고통이라도 안 주는 게 백배 천배는 나은 처사일진데, 왜 그리 사누.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1.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삶과 평화』 하지만 이런 혼란은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가치관을 내면화한 결과일 뿐이다. 자,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리자. 경제든, 평화든 우리 삶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행복’이 아닌가? 삶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경제든 개발이든 교육이든 평화든 발전이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 쓸 데 없다. 그렇다면 행복 증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민중 평화를 깨는 경제 개발인가, 아니면 민중 평화 그 자체인가? 단연컨대, 민초들이 자신의 살림살이(자급의 문화, Subsistence culture)를 우애롭고 평화롭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의 과정이다. 이 중심 잣대, 즉 줏대를 잘 세운 다음에 다른 요소들을 하나씩 고려할 때 비로소 올바른 판단, 올바른 선택, 올바른 행동이 가능할 것이다. 자, 이제부터,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라는 올림픽 구호 대신, “더 느긋하게 더 적게 더 낮게”를 외치며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참되게 구조조정하는 건 어떨까?(p157) 저자는 우리가 잘못 받아들인, 내면화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경쟁력 중심’으로 삶을 설계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경쟁력 중심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으로 그 패턴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고 평안하지 않은들 무엇이 이로운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 물론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말처럼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 여태껏 길들여져 온 경쟁력 혹은 생산력 중심의 패턴을 뒤엎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대안으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범지구적인 연대’를 통한 소통을 강조한다. 즉, 소규모 혹은 지역적인 ‘자급의 문화’를 형성해나감과 동시에 범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그 기대치와 효과를 높이며, 그에 따르는 불안과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바 있는 일에 관한 우리의 가치관에서 선진국과 차이를 보이는 게 있다. 정년에 관한 사례가 그것인데, 선진국에서의 관념은 정년이 줄어드는 게 노년의 삶과 행복을 앞당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정년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학을 뗀다는 것이다. 즉, 선진국의 관점은 자신에게 주어져야할 마땅한 행복이 정년이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유예’된다는 것. 반대로 우리는 그 ‘유예기간’을 늘임으로써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러니 일중독은 가정의 버스정류장화, 경쟁력 중심의 삶을 내면화함으로써 발생되는 문제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연대와 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행복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언제까지나 유예되거나 유폐될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게 아닐는지.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3. 제도화, 체계화, 상품화에 대하여』 또한 우리들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 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 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된 먹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 산업이 발전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환상에서 탈피하여 삶의 자율성, 삶의 친밀성, 삶의 직접성을 복원해야 한다.(p163)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서비스 경제’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역사적인 생활 패턴에 대한 이해랄까, 그런 부분들에 대한 학습이랄까, 어떤 ‘연결고리의 부재’로 인해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활패턴들에 대해 ‘당연성’을 부여한 채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모든 상황과 현상, 체제들이 인류가 여태껏 가장 합리적인 모델로써 진화시켜온 바로 그것이라고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현재가 선사하는 ‘합리성’이라는 의미만을 맹신한 채 말이다. 예전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오래된 미래》를 읽고서 생태적인 삶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뜨게 되었던 게 생각난다. 지금도 내 삶의 패턴을 모조리 바꾸지는 못한 채로 살고는 있지만, 적어도 잃어버렸거나 혹은 잊은 채로 살았던 그 ‘연결고리’를 찾고 붙잡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고,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그런 고리타분한 삶을 이야기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대부분이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 왜?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편리한 시대에 불편함을 쫓는 다는 게 어리석어 보이고 그로부터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안심리 혹은 반발심에 대한 예상이 분명하기에 연대를 통한 소통이라는 대안이 더더욱 최선의 선택으로 와 닿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밖에도 고전적 자유주의 단계와 케인즈주의 단계를 지나 현재의 단계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매우 시급하며, 그 한계성을 극복할 방안을 논의해야할 단계가 바로 지금이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행위가 아닌가 싶다. 단번에 모든 걸 해결하려고 조급해하다가는 지치고 불안을 겪고 포기까지 단숨에 이르기 십상이다. 편리한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우리 주변의 문제와 각자 삶의 설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보는 것이 최선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