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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증인.. 여섯 줌 흙이 담긴 유골함

조희원 기자 입력 2020-09-25 07:40:05 수정 2020-09-25 07:40:05 조회수 1

◀ANC▶
지난 1950년 여수에서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상대로 한 무차별 살상이 벌어졌습니다.

1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총살 당해 바다에 버려졌는데요,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시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순 특별버 제정 촉구를 위한 특별기획 증인,
오늘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해 흙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두웅 씨의 사연을 들어봅니다.
◀VCR▶
◀INT▶
"할아버지 선산 산소에 가서 묘 앞 흙 세 줌 담고, 할머니 선산 산소에 가서 또 흙 세 줌 해서 '아버지 지금부터 어머니랑 같이 계십시오' 그러고 항아리를 묻어뒀습니다."

상사호가 바라다보이는 산중턱.

장두웅 씨의 문중묘가 있는 곳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지만, 아버지의 유골함에는
흙 여섯 줌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곳은 애기섬이라고 불리는
여수와 남해 사이의 무인도 앞바다.

혼이라도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흙이 든 유골함을 묻고
묘비에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INT▶
"아버지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머님만 올릴 수가 없잖아요. 이쪽이 아버님 자리고 여기가 어머님 자리입니다. 여기에 모셔서 아버지가 이때까지 따로 계셨지만 어머님, 아버님 같이 55년만인가 그리 모셨습니다."

학교 선생이자 청년회장이었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반란군 협력자로 오인 받던 시절.

아버지 역시 좌익 활동 한 번 한 적이 없지만
교화대상으로 낙인 찍혀
보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INT▶
"하루는 갈 날도 아닌데 (보도연맹에서) 연락이 왔어. 아버지가 모시적삼 입고, 어머니 밭매는데 '어이, 나 지서에 갔다 올라네', '예, 다녀오십시오'"

밭고랑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뒷모습이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INT▶
"사촌형이 (밥을) 들고 갔다 왔는데 가져오니까, 내가 똑똑히 기억해. 어머니가 '왜 너희 작은아버지 밥 드리지 가지고 왔냐' 하니까 작은 아버지 어제 경찰서로 넘어가버렸다 그러는 거야. 경찰서 문 앞에 가니까 어제 저녁에 애기섬 앞에 가서 배에서 총살을 해서 수장을 시켰다는 거야."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7년이 걸렸습니다.

◀INT▶
"그 뒤로 호적 정리도 못하고... 하면 올까, 올까 하다가 57년도인가 그 때 사망신고를 병사로 했어."

아버지의 죽음이
많이 배운 탓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배움에 인색했고,

장두웅 씨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한평생 시골 마을에서
쌀가게를 하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INT▶
"어머니 하는 말씀이, 배우면 죽는다. 아버지가 아는 분이니까 희생됐다고. 될 수 있으면 안 가르치는 게 낫다 그런 식이라. 배운 사람이 희생되니까. 그래서 학교를 중학교만 졸업했어요."

그리고 지난 2018년
아버지가 수장된 바다에서 열린
해상 위령제에서 장 씨는,
가장 좋은 쌀을 골라 68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렸습니다.

인생의 황혼길로 접어든 장두웅 씨는
이제 특별법만 제정되면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INT▶
"(유족들이) 나이가 많아서 여든 살 넘은 사람이 많아요. 살아 계실 때 특별법을 만들어서 소송도 해서 승소를 해야지 마음이라도 편히, 먼 데 갈 때 내가 아버지한테 그래도 할 것은 했다. 명예회복을 해줬다는 그 마음을 갖게..."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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