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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피는 꽃 등록일 : 2012-05-07 10:39

겨울에 피는 꽃

일자리를 잃어버린 후,
재호는 몸과 마음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돌이 지난 딸아이에게 먹일
분유 값이 없어 애가 탔다.
친지와 친구들에게도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아
더 이상은 도움을 청할 염치도 없었다.
오늘도 재호는 일자리에 대한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섰다.
퀴퀴한 냄새 가득한 골목길에는
깨어진 연탄재만 을씨년스럽게 날렸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써 놓은 담벼락 낙서 위로
겨울 햇살이 한나절 둥지를 틀었다.
무거운 하루를 또다시 등에 이고 돌아오는 길에
재호는 문득 고등학교 동창인 성훈이 생각났다.
성훈이라면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재호는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성훈이 오래 전부터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재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친구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재호는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올라
성훈의 화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성훈은 재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겨울에도 화실의 난로는 꺼져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성훈의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손님이 왔는데 화실이 추워서 어쩌냐?"
"내가 뭐, 손님이냐. 춥지도 않은데, 뭐."
재호는 미안해하는 성훈 때문에
일부러 외투까지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내가 빨리 나가서 라면이라도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
성훈이 나간 동안 재호는 화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은 그림 속에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어둠 속에 귀가하는 도시빈민이 있었다.
자신을 닮은 그 지친 발걸음을 재호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재호는 몇 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재호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를 꺼내 입었다.
외투의 무게만큼이나 재호의 마음도 무거웠다.
"나 그만 갈게, 성훈아. 잘 먹고 간다."
"오랜만에 왔는데 라면만 대접해서 어쩌지?"
"아냐, 맛있게 먹었어."
재호는 어둠이 내린 버스 정거장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어린 딸을 생각하고
아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다 무심코 넣은 외주 주머니 속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과
천 원짜리 몇 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재호 모르게 성훈이 넣어 둔 것이었다.
재호는 빠른 걸음으로 화실을 향해 걸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실 문을 막 열려는 순간,
안에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오후에 그림을 사러 오기로
했던 사람이 오질 않았어. 수민이 생일선물로 곰 인형하고
크레파스 사간다고 약속했는데, 차비밖에는 없으니 큰일이네."
재호는 차마 화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추운 화실에 앉아 성훈은 굳어진 손에
하얗게 입김을 불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인형과 크레파스 대신 딸에게 줄 그림 속에는
아기 공룡 둘리가 분홍빛 혀를 내밀며 웃고 있었다.
성훈은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손에 들고 화실 문을 나섰다.
그런데 바깥 문고리에 비닐봉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여다본 하얀 봉지 속엔
귀여운 곰 인형과 크레파스가 담겨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선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송이처럼
그들의 우정도 소리 없이 깊어갔다.


『연탄길』
(이철환 지음 |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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