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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한 나날들 등록일 : 2012-07-12 16:03



무사한 나날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을
죽는 날까지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침을 많이 흘렸고, 늘 젖을 토했다.
두 돌이 다 지나도록 턱 밑에 수건을 매달았다.
안아주면 늘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젖 냄새에 늘 눈물겨워했다.
이것이, 내 혈육이고 내가 길러야 할 내 어린 자식의 냄새로구나,
내가 배반할 수 없는 인륜의 냄새로구나…….
술 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胎)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 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이 여자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 진부하게 순환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서
기적과도 같은 경이를 느꼈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딸이 늦게 귀가하는 날,
딸이 사다 준 휴대폰으로 딸에게 전화를 걸면
그 다 자란 여자가 말한다.
"아빠, 저 오늘 늦으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알았다. 운전 조심해라."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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