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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등록일 : 2017-12-12 14:12

어떤 노 대감이 도학이 높은 중에도, 예문(禮文)에 밝기로 나라에서
유명하였다.
한 번은 황해도에 누굴 보러 내려갔다가, 도중 관에서 알선해 주어
어느 사관(仕官) 다니는 이 집에서 쉬게 되었다.
노인이고 보니 객사 동헌(東軒)이나 여각(旅閣)집 보다는 여염집이
시중 드는데 더 편리할 것 같아 특별히 취한 조치다.
저녁 뒤에 주인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 보니 밤이 제법 깊었는데,
주인이 자리를 일어서며 공손히 말한다.
『오늘 저녁이 제 애비 제사올시다. 무어 별로 차린 것은 없습니다 만 기다리셨다
가 약주라도 한잔 잡숫고 주무십시오』
『그래? 어서 들어가 지내게. 그리고 그 제사 지내는 절차를 내 좀 구경하겠는데
괜찮겠나? 뭐 늙은 사람이긴 하지만도』
『웬 별말씀을............. 보시는 건 좋습니다마는 저희 무식한 것들이 지내는 건
어디 절차가 됐어 얍죠』
그래 노인이 앉아 내다보니 과연 알 수 없는 일이 많다.
먼저 제상 앞의 교의에는 망인의 옷가지를 걸었을 뿐 지방(紙榜)도 없다.
음식은 푸짐하게 차렸는데, 홍동백서(紅東白西)니 뭐니 격식은 애당초 없다.
그런데 더욱 별난 것은 진설(陳設)이 끝나더니, 초롱에 불을 밝혀 들고 둘이서
나간다. 얼마만에 다시 들어오는데,
『여기는 문지방입니다. 여기는 댓돌이 올시다.......』
꼭 산사람에게 타이르듯 외우며 들어와, 정면 교의로 모시어 편히 앉히는
시늉을 한다.
그러더니 두 내외가 날아가듯이 절을 한다.
그리고는 차려 놓은 음식을 덜어서는 영유 앞의 빈 그릇에 옮겨 담으며
연신 설명을 한다.
『이거는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수전병이 올시다. 이거는 뒷 뜰의 그 큰 배나무에서
딴것이 올시다. 잘기는 하여도 맛은 옛날이나 다름 없습죠』
한참 이렇게 권하는데, 산 사람이라도 그만큼 먹었으면 취하고 배부를 판이다.
그쯤 권하고 들 나더니, 안에 들어가 새 이부자리를 매어다 젯상 앞에 펴고
둘이 같이 들어간다.
『저런 해괴한 짓들이 있나?』
하며 보자니, 긴 베개를 같이 베고 뺨을 맞대고 한참이나 끌어안고 누웠다.
그러더니 일어나 이부자리를 치우고 다시 술병을 들어 몇잔 술을 권한다.
그리고는 초롱에다 불을 밝혀 들고 나선다.
『여기는 댓돌이 올시다. 여기는 문지방이 높습니다』
(옳지, 모셔다 드리는 게로구나)
그러는 데 『애고, 대고』대문간에서부터 울어 대는데 듣는 사람의 가슴마저
뭉클할 지경이다.
한참 이리 곡을 하더니 눈물을 거두고 제물을 내려 조촐하게 차려 들고 사랑
으로 나온다.
『저희 무식한 놈들 제사 지내는 풍습 과히 흉보질 랑 마십쇼』
따라 올리는 술잔을 받아 들며,
『미상불 구경을 잘 했네. 신주나 지방을 안쓴건 짐작이 가네 만도, 불을 들고
어디들을 갔다 오는 거지?』
『네, 지방이라고 진서글씨 몇자 써 놓은 것을 가지고는, 영 어미아비가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사와요. 그래 무덤이 예서 멀지 않기에, 가서 모셔 온 겁죠.
몸뚱이를 파 묻은 곳이니까 영혼도 거기 계시거니 그렇게 그냥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오죽 기운이 없어서 죽었겠습니까? 그런걸 혼자 오래면 얼른 와 주겠습
니까? 허기야 귀신 길 가듯 한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만』
『음! 다른 건 다 보아 알겠네 만도, 그 이불 쓰고 눕는 건 무슨 일이지?』
『네! 그걸 보셨구먼요. 저는 아직 총각적에 양친을 다 잃었습니다. 어미는 제가
철난 뒤에 죽었아온데, " 네가 장가들어 두 내외가 금실 좋게 지내는걸 못 보아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고 글쎄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 눈을 못 감으면 옳은
귀신이 되겠습니까? 그래 벌써 여러 해 됩니다만, "이렇게 금실 좋게 지냅니다"
고 눈감으시라고 그러는 겁죠. 이제 어린것들 생기게 되면 그 짓은 그만

두렵니다. 』
『음! 』
대감은 한참이나 신음하듯 감탄하듯 눈을 감고 앉았더니
『그리고 자네네는 곡을 나중에 하데나 그랴? 』
『네! 양반님네들은 음식 차려 놓은 앞에서 곡을 합디다 만, 산사람도 음식 먹는
앞에서 울면 목이 막히는데, 귀신은 안 그렇겠사와요? 우는 건 저희 정에 못
이겨 우는 거지, 모처럼 일 년에 두 번 정월하고 추석차례까지 한데야 네 번
그렇게 오는 분들에게 왜 울어서 기분 상하게 해 드릴게 뭡니까? 』
『음, 옳아 옳아.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모두가 옳아.
진실로 정성에서 우러나온 제사니!
자네 부모님 행복하셔이! 내 일생 배웠다는 예문이라는 게 모두 다 헛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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