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항 앞바다에 보석처럼 아름다운 추섬이 둥실 떠 있다. 추섬의 다른 하나의 이름은 '주도(珠島)'이다. 구슬처럼 생겼다 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봄철 형형색색 오색영롱한 나뭇잎 새싹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보석 구슬을 생각할 것이다.
추섬은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약 1.75ha의 면적에 수많은 난대상록활엽수림과 기타 침엽수, 활엽수가 원시 밀림처럼 우거져있다. 섬 정상에는 예전에 제사를 지내던 사당의 터 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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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섬. 한용현기자 |
851년 청해진이 무너지고 남은 군사와 주민은 현재의 전북 김제시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이후 신라와 고려조정에서 완도에 주민이 거주하는 일을 국법으로 금하여 인근 육지로부터 주민이 이주하여 살 수가 없었다. 청해진의 군사와 상인, 주민 중 극히 일부만이 깊은 산과 멀리 떨어진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살면서 12진법군고 및 지명 등 청해진의 역사 전설을 지켜왔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완도에 사람이 이주하여 사는 일을 공식 허락하여 이때로부터 완도 본도와 주위 크고 작은 섬에 주민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완도를 포함, 남서 해안이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1521년 조선 중종 16년에 완도에 수군 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왕국을 지키고자 당시 완도항의 이름이었던 '가리포(加里浦)'에 수군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진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제1대 가리포진 첨사 이빈이 부임했다. 이때로부터 가리포 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다.
가리포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가리포진 앞바다에 구슬처럼 떠있는 '추섬'을 보고 가리포라고 이름 지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러 가설과 주장이 있으나 글쓴이는 추섬의 추라는 한자는 '가래나무'를 뜻하는 '楸' 자로 본다. 그러나 가래포라고 하지 아니하고 '가리포'라고 부른 것을 보면 가래나무를 의미하지 않고 '가리'를 뜻하여 부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가리'는 곡식이나 땔 나무를 단으로 쌓아놓은 것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과거 우리말을 소리 그대로 쓸 수 있는 한글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한자를 빌려 쓰는 과정에서 '가리'가 '가래'로 바뀌었을 뿐 본래의 의미는 그대로 전해졌다고 본다. 따라서 '추(楸)' 섬은 '가래나무' 섬이 아닌 '노적가리' 섬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완도항 앞바다의 사철 난대상록활엽수림으로 덮여있는 아름다운 섬을 보고 볏단이나 보릿단 또는 곡식가마니 등을 높다랗게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상상했을 것이다.
추섬과 이무기 전설
가리포진이 설치되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언제 어느 때 몇 대 첨사인지 이름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어느 해 봄 새로운 첨사가 가리포진에 부임하였다.
어느 날 밤 신임첨사는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왜구로부터 진을 지키고 백성과 군사를 보호할 생각에 잠겨있는데 문득 앞바다에서 휘황한 광채가 하늘 높이 뿜어져 나와 빛나더니 첨사를 향하여 비추어왔다.
놀란 첨사가 부관에게 연유를 물으니 부관이 이르기를 “저곳은 가리포진 앞바다의 작은 섬이며 이름은 가리 섬이라고 하옵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나 저 가리 섬에는 큰 이무기가 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가리포와 주변 섬에 사는 주민의 자녀 중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제비뽑기하여 제물로 바쳐왔습니다. 지금 봄이 무르익어 저 이무기가 가리포 백성에게 처녀를 어서 바치라고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부관의 말을 들은 첨사는 너무도 괴이하고 안타까워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이곳 백성을 왜적으로부터 잘 지키라고 가리포진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하고 있는데 왜적도 아닌 한낱 미물에게 백성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해괴하거니와 그 사실을 바라만 보아온 첨사와 장졸들의 행태 또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아니냐고 힐책하였다.
부관이 말하기를 “저 이무기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신통력이 있는지라 백성의 고통과 딱한 처지는 이해하나 우리 가리포진 장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첨사는 부관의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괴이하여 “저 이무기가 무슨 신통력이 있는지 아느냐? 신통력을 부리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 저 이무기를 때려잡고자 시도라도 해 본 적이 있느냐?” 등등 많은 질문을 하였다.
부관은 “저 이무기의 크기가 어느 정도냐 하면 가끔 바닷가 백사장에 이무기의 비늘로 보이는 큰 고기 비늘이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 비늘 하나를 아이들 두 셋이 둘러쓰고 소나기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그러니 이무기의 크기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바람을 일으켜 잔잔한 바다를 뒤집어엎기도 하고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잔잔하게도 하옵니다. 거기에 더하여 가뭄과 홍수도 자유자재로 일으켜왔습니다. 우리 가리포진 장졸이 이곳 백성과 힘을 합하여 이무기를 잡으려고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무기의 비늘 하나 뽑지 못하였고 군졸과 백성만 상하였으며 노한 이무기가 폭풍우를 일으켜 많은 뱃사람이 죽고 실종되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이무기를 달래고 원하는 대로 계속 처녀를 바치고 제사를 지낼 뿐 달리 방도를 찾지 못하고 이제까지 지내왔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첨사는 부관의 말을 다 듣고는 아무 말 없이 빛나는 광채를 응시하다가 집무실로 들어가더니 큰 활과 화살을 들고 나와 놀란 부관이 말릴 사이도 없이 활에 화살을 메기어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을 향하여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난 찰나 청천벽력같은 괴성이 고요한 밤하늘과 가리포를 뒤흔들다가 잦아들더니 스러지는 광채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첨사는 놀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부관과 휘하군사를 모으고 주위 백성을 불러 안심시키며 어잿밤 이무기가 죽었으니 이제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이무기에 백성의 귀한 딸을 바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첨사는 여름 태풍과 겨울 폭풍, 가뭄과 홍수는 자연의 이치로서 이무기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루어낸 일이 아니다. 이후로도 자연재해는 때때로 일어나고 사람이 고통받는 일도 많을 것이나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도 부관과 백성은 가리 섬으로 건너가 이무기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를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후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다시는 이무기가 나타나 백성을 위협하지 않았고 처녀를 바치지 않아도 아무런 해코지도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첨사는 새로운 부임지를 향하여 떠나고 사람들은 이무기에 처녀를 바쳤던 일과 용감하고 백성을 위하는 첨사를 전설처럼 이야기하였다.
다시 세월이 흐른 후 어느 초여름 날 가리포에 예전의 그 첨사가 다시 나타났으나 이번에는 첨사나 벼슬아치가 아닌 평범한 선비차림이었다.
예전의 그를 기억하는 군관과 병사, 백성이 나와 큰소리로 환영하며 서로 자기 집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첨사는 마지못해 처음 부임하던 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이무기에 제물로 바칠 뻔한 백성의 집으로 가서 술과 음식상을 대접받았다.
그 백성이 말하기를 첨사 덕에 딸을 살릴 수 있었고 그 딸이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니 내 평생 첨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며 재삼 감사의 말을 하였다.
첨사는 나이 들고 몸이 약해져서 벼슬자리를 내어놓고 유람하던 중 예전 생각이 나서 이곳 가리포에 들렸노라 며 군관과 병사 백성들과 술을 나누었다.
첨사가 젓가락을 들어 상위의 안주를 집으려다 보니 버섯을 재료로 요리를 만든 게 여러 접시라 요즘 이곳에 버섯이 많이 나는가를 물었다.
그 백성이 하는 말이 첨사께서 이무기를 활로 쏘아 잡은 직후는 물론이고 첨사께서 떠나신 이후에도 근 1년간 군사는 물론 어느 백성도 가리 섬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한 1~2년 전부터 가리 섬에 드나들고 있는데 이무기의 시체나 흔적은 전혀 없고 가리 섬 전체에 버섯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이곳 가리포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첨사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묵묵히 생각하고 나서 젓가락에 들고 있던 버섯안주를 마당의 개에게 던져주었다. 개가 그 안주를 덥석 받아 물어 삼키더니 이내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놀란 군사와 백성을 보고 첨사는 말 하였다. 그 이무기가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나에게 원한을 품고 비늘과 발톱과 이빨을 모두 버섯으로 바꾸어 내어 가리 섬 사방에 뿌려놓았다. 만약 내가 이 버섯안주를 먹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이무기는 나에게만 원한이 있으니 백성이나 군사가 버섯을 먹어왔어도 아무 일이 없었다. 앞으로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안심시켰다.
첨사의 말과 같이 이후 사람과 동물이 모두 추섬의 버섯을 먹고 해를 당한일이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추섬은 완도항의 상징으로 완도 주민과 완도를 찾는 관광객 등 탐방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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