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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 등록일 : 2007-07-01 14:35
책소개
한 도시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안 보이는 `실명` 전염병이 퍼진다. 첫번째 희생자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차를 운전하던 사람. 그는 안과 의사에게 가봤지만, 의사 역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자신도 그만 눈이 멀어버린다. 이 전염병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다. 정부 당국은 눈먼 자들을 모아 이전에 정신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에 강제로 수용해 놓고 무장한 군인들에게 감시할 것을 명령하며, 탈출하려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고 말한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눈먼 자들 사이에 식량 약탈, 강간 등 온갖 범죄가 만연한다. 화재가 발생해 불길에 휩싸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수용소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수용소 밖 역시 썩은 시체와 쓰레기로 가득한 폐허가 되었고, 공기는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악몽의 유일한 목격자는 수용소로 가야 하는 남편(안과 의사)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눈이 먼 것처럼 위장했던 의사의 아내. 그녀는 황량한 도시로 탈출하기까지 자신과 함께 수용소에 맨 처음 들어갔던 눈먼 사람들을 인도한다. 남편, 맨 처음 눈먼 남자와 그의 아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엄마 없는 소년 등 이름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 눈먼 사람들의 무리를 안내하고 보호한다. 그녀는 폭력이 난무하고 이기주의가 만연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를 책임감으로 받아들이며, 희생과 헌신을 한다. 눈먼 사람들이 서로간에 진정한 인간미를 느끼며 타인과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드디어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추천감상평
왜 이 글이 예전에는 그렇게도 읽기가 힘들었는지 생각했다. 문단 구분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아서 읽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이 책에는 문단 구분이 거의 없다는걸 알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과는 많이 다르다. 또 이 책에는 대화문이 절반이지만 절대 대화문임을 표현해주는 그 흔한 따옴표도 없다. 덕분에 이 책은 순전히 활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작가는 말 그대로 자신의 글을 활자화해서 써왔을 뿐, 그것을 다시 읽어나가는 것은 100%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절대로 녹록하지 않고 읽는다는 것을 하나의 노동으로 다가온다. 전에도 내 책장에는 이런 책은 없었지만 과연 앞으로도 이런 책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눈이 멀기 시작한다. 하나 둘씩. 하지만 그들이 눈먼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 아닌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빛 속에 갖힌다. 이 글에서 작가의 대담함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 사람들의 반응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전염병과 같은 증상 때문에 눈이 먼 사람들은 즉각 격리된다. 그리고 격리된 그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그 상태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아주 오래전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있고, 그들이 인간다울 수 있었던 요소들이 빠진 상태로 돌아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이 사회를 만든 조직이 없고, 제도가 없다. 가희 무정부 상태라는 단어가 아니라 완전히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만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 와중에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는데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단 한 사람의 눈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독자에게 전달 된다는 점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이 전염병이 퍼져나간 후에도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게된다. 처음에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그녀를 생각하지만, 읽어나가면서 그 생각을 바꿔야만 한다. 그녀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폭력적인 모습을 눈뜨고 치켜봐야 하는 단 하나의 목격자이다. 그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는 이 눈감은 독자들은 위해서 그녀만이 해야하는 해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 일까지 겪을 후에 그들은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
격리된 보람도 없이 모든 곳에 그 전염병은 퍼져있다. 격리되어 있던 곳에서나 나온 이 곳에서나 그리 상황은 다르지 않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 않다. 무정부상태라는 말은 이 상황에서 사치이다.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적응해서 살아간다. 과연 길고 긴 시간동안 이 지구에서 살아온 동물 인간은 강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이런 상태로 살 수 있을지 그녀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살아있다는 것에 살아간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건 이런 상황에 쓰는 표현일 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장면을 떠올릴 만큼 이 책을 읽어나간다는건 힘겨운 과정이다. 그렇게 두툼한 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 서 길게 읽지 못할 정도로 드문드문 읽을 정도로 말이다.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건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했다. 영화 '올드 보이(Old Boy)'를 극장에서 보면서 느끼던 그 불편함과 피곤함을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또 느꼈다. 과연 무엇에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인가. 불편함을 느끼는 그 근원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흘러가는 모습을 통해서 독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함을 느낀다. 피하고 싶고 읽고 싶지 않은 불편함 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읽어야만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 순간에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그들에게는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마지막 문단을 희망으로 읽느냐 절망으로 읽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