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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한 마을에서 수십 명"..순천 도롱마을의 비극

조희원 기자 입력 2021-03-05 07:40:08 수정 2021-03-05 07:40:08 조회수 1

◀ANC▶
여순사건 당시 지역 곳곳에서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역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가장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던 마을은 순천 도롱마을인데요.

특별기획 증인, 오늘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가족과 이웃들에게 벌어진 비극을
지켜본 방경규 씨를 만났습니다.
조희원 기자입니다.

◀VCR▶

14연대 출신 빨치산 간부
이영회의 고향이었던 순천 도롱마을.

인민위원회의 주 활동무대이기도 했던
도롱마을이 진압대의 표적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INT▶
"학교에서 집으로 오니까 그 순경들이 도롱리를 포위해서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개, 소, 닭 다 총살해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도롯가에 이렇게 해 놓고 있더라고."

마을 치안을 위해서라는 말에
인민위원회에 협력했던 두 형은
행여 화를 입을까
마을을 떠나 외갓집으로 몸을 피했지만,
진압대의 색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찰들은 마을에 상주하며
모진 고문, 협박과 함께
남은 가족들을 설득했고,

견디다 못한 방 씨의 어머니는
형제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INT▶
"조사만 받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렇게 어머님에게 살살 구슬리면서 그러니까 어머님이 이렇게 이렇게 한단다 가자 그러니까 형님이 나섰어."

그러나 거짓말이었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두 형제는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
연행됐습니다.

그렇게 유치장에서 갇혀 지낸 지 십여 일..
모자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작은 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됐습니다.

◀INT▶
"똘똘 뭉쳐서 이만한 종이 뭉치를 밥그릇에 넣어놨더라고. 그놈을 펴보니까 '형님은 진작 나갔습니다. 나는 내일 나갈 겁니다. 살아 나오면 어머님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 단지 그 말만 쓰여 있어."

훗날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방경규 씨의 큰 형 방용규 씨는
순천 이수중학교에서,
작은형 방영규 씨는 광양 덕례리 골짜기에서
집단 총살을 당했습니다.

방 씨의 어머니는
목숨과도 같은 두 아들을 제 손으로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INT▶
"눈이 차츰차츰 부어올라요. 하루에 이렇게 붓는 게 아니고, 한 15일간 차츰차츰 부어오르더니 그 후에는 싹 주저앉으면서 눈동자가 곪아버렸어. 곪아버려서 봉사가 되어서 30년을 고생하다 죽었다니까. 이 한을 어디에 풀 거야."

도롱마을에서는 방 씨 형제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반목하던 이웃들은
부역자를 찾아내라는 진압대의 명령에
서로를 가리켰고,

결국 도롱마을은
여순사건 당시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마을로 역사에 남게 됐습니다.

◀INT▶
"그때 손가락 총이 나온 거야. 손가락질하면 경찰에서 보고 빼내서 총살해버려요. 산골짜기 가서. 가만히 되돌아 암암리에 생각해보면, 우익, 좌익. 근 50명 가까이 죽은 거 같아. 이 마을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수많은 이웃 사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방경규 씨.

마지막 남은 소원은 하나뿐입니다.

◀INT▶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한심스럽고 기가 막혀. 이제 죽을 날만 바라는데 나 같은 세상 살아온 사람 드물 겁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이것이나 형님들 돌아가신 (억울함을) 풀었으면 눈을 감겠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듭니다."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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