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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고 장환봉 씨가 여순사건 재심에서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 유족들의 재심 청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재심을 청구한 분은, 고 장환봉 씨와 함께 순천역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를 둔 김규찬 씨인데요. 조희원 기자가 만나 그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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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재심을 청구한 김규찬 씨.
계기가 된 건 어느 날 TV에서 접하게 된
아버지의 동료, 순천역 철도기관사
고 장환봉 씨의 재심 소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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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까 배경화면에 철도원 (명단이) 쭉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화면에. 저분이 있으면 우리 아버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분명히 그렇게 돌아가신 거니까. 그래서 제가 국가기록원에 갔죠."
김 씨의 아버지 고 김영기 씨는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여객차장이었습니다.
여순사건 다음날인 20일 아침,
순천역에 도착한 14연대를 태워줬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혀간 김 씨는,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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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갔는데 '너 내통한 거다. 대라. 똑바로' '우린 그런 사실도 없고 결백하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잡아갔어요.)"
당시 유복자였던 김규찬 씨는
태어나서 단 한 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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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지났을 때 어머니가 저를 업고 제 위의 3살 누나 데리고 이렇게 해서 마포형무소에 면회를 갔었어요. 갔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열차사무소 동료들의 탄원서도 들어오고, 얼마 전에 책임자도 다녀갔다. 아마 곧 나가게 될 거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습니다.
두 달 뒤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 틈을 타 형무소에서 탈출한 아버지는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실종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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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이 탈출했다고 하니까 체포조가 아마 순찰을 했나 봐요. 국군하고 경찰이. 대전역 지나고 나서는 아버지를 못 뵀다. 그때 동료 승무원이 할머니한테 와서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김 씨 가족에게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순천역 관사에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나는 괴질로 세상을 떴고,
어린 여동생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행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입에 풀칠을 겨우 면하고 자란 김규찬 씨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철도원이 됐습니다.
1976년부터 79년까지
전라선에서 근무했던 김 씨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지만
벽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INT▶
"다니면서 그때 철도원들에게 물어보면 여순사건에 대해서 생생하게 다들 알고 계셨어요. 우리 아버지도 잘못되셨다 하면 그분들이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다들 입을 다물어버려요. 여순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아니었죠. 그 당시는."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1999년,
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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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가) 당시 순천역 차장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MBC에 연락했죠. 우리 아버지와 같은 소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분을 좀 뵙고 싶다. 그래서 MBC가 주선을 해줘서 그분을 만났어요."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였던
동료 생존자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기록 조각을 맞춰가던 김 씨는 마침내 올해,
여순사건 두 번째 재심 청구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11월 첫 심문기일에서 재판부는
"고 장환봉 씨와 상당히 유사한 사건"이라며
조만간 재심 개시여부를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72년 만에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있게 된
김규찬 씨.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끌려갔던
순천역 철도원 66명의 명예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숙제를 다 끝마치지 못한 느낌입니다.
◀INT▶
"꼭 (특별법) 제정이 되어야 하겠죠. 지금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순천, 여수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냥 놔두면 언제 치유가 되고 언제 화합이 되겠습니까. 꼭 되어야 하죠.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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