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검색

커뮤니티 좋은생각

반딧불이 등록일 : 2010-09-11 22:52

가을바람이 우수수 낙엽을 몰고 다녔다. 은행나무의 긴 그

림자가 교수실 안으로 해쓱한 얼굴을 디밀더니, 조롱조롱 얼굴

을 맞댄 노란 은행알들이 경화 씨 눈에 정겹게 들어왔다. 경화

씨는 기말고사 시험지를 채점하다말고 우두커니 창 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신기루처럼 환한 대학시절의 추억들이 경화 씨

마음속으로 성큼 다가왔다. 모교의 교수가 된 경화 씨에게 지

난 기억들은 언제나 유쾌한 아픔이었다.

경화 씨가 대학시절 퀭한 눈으로 중앙도서관을 오갈 때면

늘 마주쳤던 청소부 아줌마가 있었다. 몽당비만한 몸으로 이곳

저곳을 오가며 분주히 청소하던 아줌마, 개미떼처럼 기미가 앉

은 아줌마의 얼굴엔 한겨울에도 봄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청소

부 아줌마를 만나면 경화 씨는 항상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아줌마, 오늘도 또 만났네요. 아줌마도 반갑지요?"

"그럼요. 반갑고 말고요."

"아줌마께 여쭤볼 게 있어요. 어떻게 아줌마 얼굴은 언제 봐

도 맑게 개어있지요?"

그렇게 물을 때마다 아줌마는 빙그레 웃으며 결린 허리를

두드렸다.

"그거야, 희망이 있기 때문이지. 대학 다니는 딸이 어찌나

착하고 열심히 공부하는지, 딸애만 생각하면 허리 아픈 것도

다 잊어버려요."

"대학 다니는 딸은 얼굴이 예쁜가요?"

"그럼요. 이쁘구 말구요."

"딸의 이름이 뭔데요?"

"이름은 경화구. 성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우스꽝스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 두 모녀는 까르르 웃곤 했

다. 청소부 아줌마는 바로 경화 씨 어머니였다. 경화 씨는 마음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청소하는 엄마를 만나면 늘 그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엄마를 대신해 걸레질을 할 순 없었

지만, 열람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크고 작은 휴지들이 경화 씨

손에 언제나 가득했다.

대학시절을 회상하던 경화 씨는 문득 시계를 봤다. 그리고

서둘러 교수연구실 문을 나섰다. 경화 씨는 엄마가 있는 행정

관 지하 보일러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엄마는 비좁고 궁색

한 방 한구석에서 낡은 수건을 줄에 널고 있었다.

"아니 우리 딸, 민 교수님이 여기 웬 일이세요?"

"그냥."

"왜,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다행이구. 근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실은 엄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경화 씨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있잖아., 청소일 그만두면 안 돼?"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내 몸뚱이 성한데. 왜 일을 그

만 둬."

"엄마 나이도 있고, 허리도 무릎도 많이 아프잖아."

"나야, 이날까지 청소일로 이골 났는 걸 뭐. 하루 이틀 허리

아픈 거냐. 허긴 네가 학생들 가르치는 대학에서 엄마가 청소

일 하는 게 창피스러울까봐,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냐. 너, 혹

시 그래서 그러는 거냐?"

"아냐, 그런 거 아냐. 엄마."

"그런거 아니면 됐다."

경화 씨는 속마음을 들켜버린 듯 엄마의 물음에 당황한 빛

을 보였다. 같은 대학 내에서 청소일을 하는 엄마가 경화 씨 마

음엔 무거운 돌처럼 매달려 있었다.

"엄마가 청소일 한 지 얼마나 됐는 줄 아냐?"

"나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니까 얼마나 된 걸까?"

"벌써 삼십 년이나 됐다. 너 어릴 적부터 지금가지 내 뼈마

디 마디를 다 묻은 곳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아파

누워 있는 어린 너를 방에 두고 새벽버스를 타고 나와야 하는

에미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데······.그런 날이면 하루 종일

눈물만 닦으며 일한 적도 많았었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엄마의 얼굴은 깊은 회한에 잠

겨 있었다.

"이제는 엄마가 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잖아. 엄마도 봉

천동 집에 혼자 계시지 말고 이젠 우리 집으로 들어오셔야지.

김 서방도 그걸 바라고, 아이들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것도

좀 그렇구 해서 말야."

경화 씨는 진심을 말하면서도 조금쯤 감추어진 속마음을 차

마 드러낼 수 없었다. 명색이 교수가 돼가지고 엄마 허드렛일

시킨다고 사람들이 수근거릴 것 같다는 말이 경화 씨 입에서만

깔끄럽게 맴돌았다.

"허기사 이일 그만두고 나면 몸뚱이야 편하겠지. 그런데 에

미 마음속엔 차마 이일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야. 엄마

에게 있어 청소일은 쓸고 닦는 일만은 아냐. 이 에민 삼십 년

동안 이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해왔어. 아버지도 없이 불쌍하게

자란 내 딸이 순탄하게 지 갈길 걸어가게 해달라고 빌었던 간

절한 기도였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쓸고 닦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흉하게 붙어있는 껌을 뜯어내며 인상 한번 쓰지 않았다.

남들 걸어가는 길 깨끗하게 해놔야, 내 새끼 걸어갈 길 순탄할

거라고 믿으면서······."

차마 엄마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서, 곰팡이 핀 벽만을 바라

보던 경화 씨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엄마, 내가 괜한 말을 했지?"

"아니다. 네 마음 다 안다. 학교에서 엄마와 마주칠 때 네가

창피해 할까봐 엄마는 내심 걱정되기도 했는데, 늘 달려와서

에미 손을 잡아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창피하기는, 엄마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엄마는 꺼칠꺼칠한 손을 뻗어 딸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에미는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지난번 교수식

당에서 너랑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데 어찌나 낯설고 어색하던

지 모르겠더구나. 어엿한 교수님이 내 딸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더구나. 고개도 못 들고 에미가 밥 먹을 때, 너는 음식 맛

있어 코박고 먹는 줄 알았겄지만, 지나간 세월이 고마워서 눈

물 감출 길이 없어 그랬다. 때론 서러움까지 당해야 했던 곳에

서 내 딸이 어엿한 교수가 됐다는 것이 하도 고마워서 말야. 걸

레질 허다가 물이라도 조금 튀는 날이면 사납게 쏘아붙이고 가

는 여학생들을 그저 웃음으로 흘려보낼 때, 에미 심정인들 좋

았겄냐. 그래도 쓴 인상 한번 보내질 않았다. 그래야 내 자식

잘 되겠구나 허는 생각에······.지금도 네가 학생들 가르치는,

더 책임있는 일을 하는데 내가 어찌 이곳을 떠날 수 있겄냐. 무

지랭이 에미가 도와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말이다······."

경화 씨는 엄마를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먹이

며 말했다.

"엄마, 고마워. 엄마를 보면 반딧불이가 생각나. 야윈 몸 한

켠에 꽃등을 매달고 깜박깜박 어둠을 밝혀주는 반딧불이 말야.

엄마의 속 깊은 마음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엄마, 있잖아 어

제 우리과 교수님들 회식이 있었거든. 강남에 있는 일식집에서

했는데, 식사비가 얼마나 나왔는 줄 알아. 한사람당 십만 원 해

서 육십만 원이 넘게 나왔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 생각

을 하니까 그렇게 서럽더라구. 우리 엄마는 새벽 다섯 시 반이

면 집을 나와, 삼십 년 동안 눈비 맞으며 고작 받는 한 달 월급

이 육십오만 원인데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더라구. 2000

년도에 월급 육십오만 원 받는다면 누가 믿겠어. 그래서 엄마

한테 이런 말 했던 거야. 미안해, 엄마."

"미안하긴, 엄마가 늘 너한테 미안하지."

엄마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경화 씨는 엄마 품에 안겨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으로 소리없이 엄마에게 말했다.

'어머니, 당신은 삼십 년 동안이나 어두운 새벽버스에 지친

몸을 실으셨습니다. 낡은 청소복에 아픈 허리 깊이 감추고 늘

바보처럼 웃으셨습니다. 반딧불이처럼 환한 불빛으로 반짝이고

싶어하는 철없는 딸을 위해 당신은 더 짙은 어둠이 돼주셨습니

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출처 : 반딧불이(이철환 지음)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