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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밤의 꿈,,,< 4인4색 여수MBC 신춘음악회 감상기 > 등록일 : 2012-04-20 14:06

 

 

봄꽃 눈부시게 피어나는 그날 밤,

다섯분의 음악인들이 노래로 들려준 봄꽃이야기는

우릴 취하게했고,

널리 퍼져나간 음률은

잠든 영취산 진달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4월 17일(火) 4인4색 신춘음악회 이야기입니다.

문화예술을 통해 행복한 시민을 만드는 한마당.

삶의 번뇌와 상념들이 무참히 쓰러지는 밤이었지요.

버거운 삶을 살아가면서

예민해진 이성은 부드러워졌고

눌려있던 감성은 오랜만에 풀려났습니다.

한달 여를 기다려온 이 공연에

저는 초등학생 딸아이와 함께 했습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의 드라마틱 테너 김남두,

안정되고 고운 음색의 프리마돈나 소프라노 박정원,

천년동굴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사의 목소리, 바리톤 고성현,

세련된 창법 멋진 연기를 조화롭게 엮은, 소프라노 김영미,

무대의상도 아주 멋졌고

정성껏 노래하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특히 찬사를 보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이크(Mike; Microphone; 확성기; 증폭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육성으로 노래하는 것은 오페라 음악과 성악가들의 연주에서

지극히 당연히 전제되어야할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슬며시 성능 좋은 마이크를 사용하여

편하고 기교적인 기계음을 쏟아내는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인근 K시에서 있었던 신춘음악회에서

소위 쓰리테너( Three Tenors )가 노래하는데

마이크를 사용하는 바람에

귀만 얼얼하니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클래식 성악가의 노래를 듣고자 하는 가장 으뜸가는 목적은

그의 육성을 그대로 접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수십년 동안 갈고 다듬어

깊고 그윽하게 쌓아올린 소리의 내공을 느끼고자 함입니다.

 

바람 없는 실내에서

성악가의 훈련된 깊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와

공기를 진동시켜 우리 귀에 와 닿게 되면

그 소리의 질감과 입체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느껴집니다.

실크같이 부드럽기도 하고 삼베처럼 거칠기도 하며,

물처럼 미끈하기도 하고 기름처럼 끈적거리기도 하며,

가는 봄비처럼 여리기도 하고 맹수처럼 거세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우리 몸속으로 흘러들어와 구석구석 퍼지면서,

그 여러 느낌들이 복합적으로 조화롭게 얽혀서

진한 울림과 잔잔한 여운으로 아련히 지속됩니다.

이 때 바로 전율할 듯한 감동이 솟아오릅니다.

바로 황홀감입니다.

삶의 기쁨을 한 차원 높이는 즐거운 체험이지요.

이것을 두고 바로 플라톤(Plato)이,

“음악은 인간의 영혼 속으로 파고든다.”라고 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성악가의 소리가 마이크 속으로 들어간 다음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는 순간,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는 인간의 음성을 기계적인 전기 신호로 변환시키는 장치입니다.

음성이 기계적 진동으로 변하고,

그것이 스피커를 통해 크게 확장되어

음향 에너지로 사람들의 귀에 전달됩니다.

이 과정에서,

곡진한(曲盡:간곡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성악가의 음성은 사라져 버리고

기계적 조작음이 크게 크게 울려 퍼질 뿐입니다.

원래 음성이 지녔던 질감과 입체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밋밋한 비닐 촉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요컨대 마이크는 큰소리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예술적 감흥을 전하는 매개체는 결코 되지 못합니다.

 

성악가 조수미도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성악가는 2천명의 청중들이 든 무대에서도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노래해야한다“

음악예술의 본고장 유럽에서도

특별한 야외공연이나 초대형공연이 아니고는

오페라나 성악무대에서 당연히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청자의견>란에 올리신 어느 시민의 ‘마이크 설치’ 말씀은,

노래할 때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회를 보거나, 청중들과 혹시 말씀 나눌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마이크로 이해됩니다.

맞지요?

 

재미와 통쾌함도 좋지만,

인간에게는 감동과 여운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항상 목말라합니다.

기계적 소리는 싫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음반, CD, MP3등 너무 많이 널려있습니다.

우리는 원형질의 인간의 목소리 그대로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영혼의 교감과 위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리만큼 강력히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마이크 사용이 성악가들에게 관례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더더욱 우리 시민들과 우리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예술의 맛과 멋을

느끼고 누릴 수 있게 해주어야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동시에 성악가 자신들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좋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피아노 반주로 해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성악가들의 그 ‘소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약간 아쉬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선, 반주와의 호흡에 문제가 약간 있었지요.

성악연주에서는 성악가의 노래가 제왕입니다.
반주자 제랄드 무어가

" Am I too loud? (제 반주소리가 너무 큰가요?)" 라고 자주 물으며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피아니스트 반주의 대가로 우뚝섰음을 기억합니다. 

반주자는 완벽히 준비된 기량, 빈틈없는 연습, 충분한 리허설로

노래가 아름답게 꽃피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연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청중들이 박수를 치는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최후의 미세한 여운이 남았을 때는 끝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여기에서 감동이 극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은 공연 전에 주최 측에서 청중들에게

간곡히 주지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셋째, 성악가들의 경우 네 분의 오페라 아리아와 남성 2중창이 끝난후,

우리가곡 부르는 순서에서 다소 이상했습니다.

약간 몰입도가 떨어지고 목소리에 약간 피곤함이 느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호흡 문제였을까요?

청중들의 호응과 환호가 약했기 때문일까요?

좌석이 군데군데 약간 비어서 였을까요?

 

넷째, 전체적인 연주 시간이 좀더 길었으면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짚고자합니다.

연주 말미에 여러차례의 열렬한 커튼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악가들은 단 한곡의 앵콜곡도 준비가 안되었는지,

이미 했던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한번 더 노래할 뿐이었지요.

그 사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대단히 허무했습니다.

추후 연주회에서는 반드시 점검 요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고성현의 가곡 <그리운마음>은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근래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열창이었습니다.

탁월한 기예와 감정, 긴 호흡,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한 음량의 기묘한 조절,

찬란한 포효와 시냇물같은 섬세함,

명불허전, 역시 세계 최고반열의 성악가였습니다.

지금 저도 그 노래 악보를 구하여 감히 배우고 있습니다.

혹 연주회에 작은 아쉬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감동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던

마법사 멀린의 위로와 지혜의 일갈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풍류화가 김홍도가 친우 이인문과 함께한 "마상청앵도"에서

읊었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佳人花底簧千舌 (가인화저황천설)”

“어여쁜 이가 꽃 아래에서 천 가지 음악을 연주한다.”

 

그날 밤

우리는 봄 꽃피는 밤에

많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들으며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즐거움과 감동에 감사드립니다.

양지와 음지에서 수고한 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주최, 주관, 후원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준 높은 시민들께도 감탄을 보냅니다.

 

다음날 아침

아파트 화단에서는

붉은 복사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꽃들도

전날 밤 울려 퍼진

그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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