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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수유 마을' 구례 산동 (한국일보) 등록일 : 2006-12-06 17:15

전설이 된 새악시 붉은 눈물이 알알이…

구례 산동면 현천마을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새봄 노랗게 피어났던 산수유꽃들이 빨간 보석으로 여물어 산천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봄빛보다 노랗던 봄의 전령이 핏빛보다 붉은 보석으로 여물어, 이제 겨울을 노래하려 한다.

지리산 자락의 산수유마을이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원에서 밤재터널을 지나 만나는 전남 구례의 산동면. 매년 3월이 되면 노랗게 익기 시작한 첫 봄을 맞으러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산수유 집산지다. 상위마을, 현천, 원촌 등 30여 부락이 산수유를 키우고 있다.

산동에서 나는 산수유는 전국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1,000년 전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한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 가져와 심었다고 해서 ‘산동’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명 자체가 ‘산수유’의 전설을 품은 땅이다.

봄이면 돌담 위로 황금가지 늘어뜨리던 마을은 이제 루비처럼 영롱한 붉은 보석 알갱이들로 눈이 부시다. 소설가 김훈은 노란 산수유 꽃을 일러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 꿈의 결실이 단단하게 익은 지금의 붉은 열매다.

붉디 붉은 산수유 열매를 찾아 오른 곳은 상위마을과 19번 국도 건너편의 현촌마을. 산동에서 가장 많은 산수유 나무가 있는 만복대 자락의 상위마을은 임진왜란때 피난민들이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다. 지금이야 마을 아래까지 길이 시원하게 뚫렸지만 예전에는 이런 오지도 없었을 것이다. 100집이 넘었던 마을은 한국전쟁을 치르고 지금은 30여집으로 줄었다. 이 마을이 특

산수유를 수확하는 주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히 아름다운 것은 냇물과 산수유, ‘다무락(돌담의 사투리)’과의 조화다. 가슴 높이의 마을 돌담길을 따라 따라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아직은 산수유 잎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 잎들이 지고 산수유 열매가 좀 더 꾸덕꾸덕 마르면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된다.

빨간 과육과 씨앗을 분리해, 그 과육으로 차와 술, 한약재 등을 만든다. 산수유의 효능은 그 아름다운 빛 만큼이나 뛰어나다. 신장계통,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부인병 등에 효험이 있고 특히 남성 건강과 정력에 좋다고 한다. 예전 마을의 처자들은 열매를 입으로 깨물어 씨를 발려냈다고 한다. 시큼한 산수유를 하도 많이 까는 바람에 앞니가 많이 닳아있어 여인의 치아만 보고도 산동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치아는 비록 상했지만 산수유를 물었던 입술은 유독 붉었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추는 바깥양반들은 저절로 양기를 얻어 부부금슬이 좋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요즘엔 기계가 대신 씨를 발라낸다.

산수유 수확철이 되면 일부는 ‘놉(일꾼)’을 쓰기도 하지만 요즘 촌에선 놉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노령의 등 굽은 노인들이 직접 나무에 올라타서는 열매를 털어낸다. 힘은 들어도 어르신들 표정엔 미소가 한가득이다. 산수유열매는 이들의 주된 수입원이다.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나무가 산수유다.

상위마을 아래 반곡, 대음마을은 계곡을 끼고 있다. 계곡물 스치는, 장정 백여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반석이 장관이다. 관광객 발길이 뜸한 현천마을은 덜 알려진 산수유 명소. 지리산 온천랜드에서 19번 국도 건너편 견두산(774m) 자락에 있다. 40여 가구 80여 명이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관광지화한 상위마을과 달리 구멍가게 하나 없는 전형적인 산촌이다. 돌담과 낮은 지붕 위로 붉은 보석 알알이 박힌 산수유 가지가 축축 늘어져 있다. 고샅을 지나다 만난 한 할머니는 멀리서 온 손님이 반갑다며 “뭐 줄건 없고 텃밭의 머위나 좀 뜯어가라”했고, 산수유를 따다 객을 맞은 다른 할머니는 “대접할게 뭐 있냐”며 짐을 뒤적이더니 새참으로 남겨뒀던 두유 하나를 내준다. 오랜만에 만난 말상대에게 시집왔을 때 이야기, 자식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의 입가엔 산수유 열매보다 진한 정(情)이 담겨있다.

산수유 열매의 진하디 진한 붉은 빛에는 산수유 마을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지리산 자락을 피로 물들인 이념의 광풍 탓이다. 여순반란사건때 19살의 백부순이란 처녀가 부역 혐의로 희생됐다. 경찰에 끌려가며 그가 구슬프게 불렀다는 ‘산동애가’가 지금껏 남아 있다.

‘잘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로/ 까마귀 우는 골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스러졌네~’


댓글(1)
  • 2006-12-06 17:16

    저도 산동마을이라는 곳을 가봤는데..
    전 버
    저도 산동마을이라는 곳을 가봤는데..
    전 버스타고 갔었거든요. 가는데 좀 많이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정말 시골냄새 풀풀 나는 그런 좋은 마을이었습니다.
    처음보는 산수유라는 열매도 너무 신기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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