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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타고 되돌아가다, 군산으로의 시간여행 등록일 : 2008-03-26 08:51

아침이면 어둠을 헤치며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에 대한 의미 부여는 특별한 시기가 아니면 식상하다. 그런데 군산을 밝히는 일출은 언제 봐도 남다르다. 과거 수탈의 현장이란 상처를 씻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향한 꿈틀거리는 군산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군산은 최근 부안 변산반도까지 이어지는 새만금방조제가 완성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금강의 물살을 헤치고 떠오르는 붉은 해처럼 도시 전체가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산이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 군산.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영이 설치됐던 군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던 창구가 되고 말았다. 해방 후 쌀의 수송이 끊기면서 자연스럽게 활기도 사라졌고, 그렇게 60여 년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서는 일제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의 유명 일간지는 군산의 분위기가 70~80년 전 도쿄와 비슷하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실제 도시를 거닐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지명과 건물이 적지않게 남아 있다. 군산시는 이 일대를 근대문화의 거리로 지정,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내놓았다.

군산=글·사진 박상언 기자 separk@joognang.co.kr


희망의 상징 일출을 만나다
내항은 일출이 아름다운 곳이다. 금강을 따라 떠오르는 해는 밤새 추위에 떤 갈매기를 깨우고, 외롭게 서 있는 등대를 살짝 어루만진 다음 하구에 가득 쌓인 개흙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면서 장엄하게 떠오른다. 아기자기한 모습이 단조롭게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동해의 단조로운 일출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마치 용트림을 준비하는 군산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내항이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이 당했던 수탈의 상징이었다는 점이 가슴을 짓누른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 중 거의 대부분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1800년대 말 조선에 들어온 일제는 끝없이 펼쳐지는 호남평야를 본 후 금강의 남쪽 끝 군산을 주목했다. 쌀을 실어나르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군산의 한켠을 개발, 항구를 건설하는 한편 마을을 꾸몄다. 1899년 개항한 항구는 지금 내항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월명동까지 일제는 일본인 마을을 조성했다.

내항에는 약 1㎞에 걸쳐 접안시설을 만들고, 이곳에 6개의 부잔교를 연결했다. 부잔교란 밀물 때 떠올랐다가 썰물이 되면 바닥으로 가라앉는 다리다. 그리고 인접 지역과 연결된 철도를 이용해 쌀을 실어날라 항구에 만들어놓은 창고에 산처럼 쌓았다.

이어 6개의 부잔교에 3000톤급 화물선을 댄 후 끊임없이 쌀을 실어날랐다.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갯흙이 쌓이자 아예 준설전을 갖다놓고 흙을 퍼내는 작업도 병행했다. 많게는 한 해 200만 가마의 쌀을 운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과 함께 쌀 운송은 물론 준설도 필요없어져 항구도 쇄락해갔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군산에는 국가등록문화재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항구를 중심으로 몰려 있다. 또한 모두 일제 패망 후 이른바 적산가옥으로 분류됐던 일제의 잔재들이다. 이중 대표적 문화재는 군산 개항 100주년 광장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옛 조선은행과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시점 건물, 군산세관 건물 등이다.

구리 기와를 얹은 3층 규모의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1923년 지어졌고,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은 1907년 개설한 건물이다. 그리고 군산세관 건물은 1908년 독일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990년까지 사용하다 지금은 세관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큰 길을 건너면 월명동·신흥동이다. 일본인 마을을 조성한 지역으로 바둑판처럼 구획조성이 잘 돼 있다. 마을 곳곳에서는 일본식 건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 히로쓰가옥. 군산에서 큰 포목점을 하며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 지은 일본 무사들의 고급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형 목조주택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의 집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남서쪽으로 좀 더 가면 동국사라는 절을 만난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일본식 사찰이다. 내항 부근에서 사찰을 운영하던 일본인 승려 우치다가 1913년 일본에서 삼나무 등 재료를 가져다 이곳에 지은 것으로 가파른 지붕에 단층식 팔작지붕, 건물 외벽의 많은 창문 등 대웅전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일본식임을 알 수 있다. 동국사는 또 시인 고은이 머리를 깎고 불교에 입문한 사찰이기도 하다. 대웅전 뒤편에는 일본 대나무가 무성하다. 원래 이름은 금강에서 따온 금강사였으나 해방 후 동국사로 바꿨다. 대문 기둥에 금강사라 쓰인 문패가 남아 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가면 석등과 석탑 등 보물 두 점이 있다. 절터도 아닌데 이같은 유물이 있다는 점이 생뚱맞다. 실은 일제 때 일본인 대지주였던 시마타니가 자신의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인근 사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래서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이곳 지명을 따라 "발산리 석등"(보물 234호), "발산리 5층 석탑"(276호)으로 불린다. 이뿐이 아니다. 주변에는 왕이나 귀족의 능, 절에서 가져온 듯한 문인석·석양·부도 등 30여 점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 대신 개인의 욕심만 채우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바로 옆에는 사마타니가 귀중품을 넣어두는 금고로 사용했던 3층 규모의 건물이 있다. 거푸집을 이용해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은 건물 입구를 가로막은 20㎝ 두께의 철문에는 미국 제품이란 문구가 선명하다.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의 고혈을 짜내며 얼마나 많은 재물을 수탈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증거물이다.

군산간호대학 구내에는 "이영춘 가옥"이 있다. 전국 최대 농장주였던 구마모토가 1920년 지은 별장인데, 유럽풍 외관에 일본식 응접실, 한국식 온돌 등을 갖춘 건물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를 초빙하기 위해 내준 집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이 박사가 구마모토의 초청으로 군산으로 이주한 후 살았던 가옥이다.

댓글(1)
  • 2008-03-27 13:54

    군산 언젠간 가보고싶던데.....
    군산 언젠간 가보고싶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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