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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슬픔 등록일 : 2009-05-13 16:25
(조병준, 사진으로 사랑을 노래하다)
조병준 지음 / 샨티 / 2007년 9월
평점 :
따뜻한 슬픔.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차가운, 아니다, 이 형용사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 있다.
그 슬픔에 어떤 형용사를 붙여주어야 하는가.
시린 슬픔?
아니다, 여전히 부족하다.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
「따뜻한 슬픔」전문; p77
◎..첫눈에 반한다는 말..◎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나는 그 ‘기적’같은 말을 믿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말로는 정확하게 꼬집을 수 없지만 그 ‘느낌’이란 게 좋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느낄 수 있을 법한 그런 교감에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를 때가 있다. 느낌이 좋은 사람, 느낌이 좋은 가게, 느낌이 좋은 그림 등을 만날 때, 그 알 수 없는 ‘한순간’은 내 몸을 파고든다.
책과 첫눈에 반하기. 아마 이번이 처음이거나 몇몇 손꼽을 만큼도 안 되는 듯하다.《따뜻한 슬픔》은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게 파고든 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 한 장과 제목을 마주하는 순간, 마치 애달피 우는 듯 한 ‘거부할 수 없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고나 할까. 우연일지도 모르고, 운명일지도 모를, 어쩌면 아주 우아하게 ‘숙명’이라고 명명하고 싶은 그 ‘한순간’은 나를 다독이고 내 안의 모든 슬픔을 녹이는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채로운 사진과 더불어 시를 함께 담고 있다. 오롯이 이해할 수도, 그럴 만한 능력조차 없는 내게 조금은 버겁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진이 주는 영상미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시인이 남긴 흔적(시)을 내 낙서로 채워갈 수 있게끔 이끌었다. 정제된 단어로 완성된 시가 사진을 통해 영롱한 빛깔로 날아올랐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구들은 제 빛깔을 찾아 방황하다 내 손에 잡혔다. 오롯이 이해할 수 없던 시들이 그저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을 읽어냈으며 무엇을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그 ‘한순간’을 느꼈을 뿐이다.
때때로 사진과 시가 너무 착! 하고 달라붙는다. 억지로 구겨 넣어 구색을 맞추려한 실수(?)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귀여운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는 것은, 시가 그렇던 사진이 그렇던 간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것’들로 구겨져 있기 때문이랄까. 좋다면 한없이 좋아 책이 지저분해질 만큼 부인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고,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해, 그렇게 끝남이 없었다. 그뿐이다.
모든 생은 더부살이어라. 당장에 내 주변의 모든 것들과 결별을 선언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다짐해보지만, 결국은 어느 곳에, 누군가의 어깨와 잇닿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고 그걸 순전히 받아들이기도 쉽지만은 않다. 그런 꼬리를 달고 애써 닿아있지 않은 척해보지만, 누군가에 의해서라도 닿아있는 우리네 생.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생의 시린 겨울 앞에 조금은 담담하고 따뜻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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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미친 것 맞습니다.
물에 허천 들린 것 맞습니다.
마른 땅에서 자라야 하는 천성 따위 엿먹이고 싶었습니다.
굴러 굴러 물가로 갔고 거기에 뿌리내렸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홍수 찾아와도 뿌리 악물고 버텼습니다.
네, 미친 것 맞습니다.
물에 허천 들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천성 따위 내 알 바 아니었습니다.
마른 땅에 자라는 나무에는 내려앉지 않는
당신들, 날개 달린 종자들이 그리웠습니다. (「물 속의 나무」전문; p21)
분별하지 않고 살기,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생,
고단하다.
저 안개 속 강처럼, 나무들처럼,
분별없이, 분별하지도, 분별당하지도 않으며 살고 싶다는,
흐릿한 욕망. (「분별」부문; p45)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시간,
그래서 멈춘 시간 속에 함께 멈춰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형벌의 시간이며 동시에 축복의 시간이다.
당신, 지금 기다리고 있는가? (「기다린다」부문; p60)
비 그친 도시에 내리던 마지막 햇빛.
그 추운 햇빛 아래 겨울 나무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나무에 날개 젖은 새 한 마리 있었다.
내가 나무였는지 새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의 생인들 나무였던 적, 새였던 적 없을까.
상대가 나무이길 원하면 새가 되고
새이길 원하면 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 누구에겐들 찾아오지 않을까.
추운 겨울비 속을 날아온 새 한 마리 위해
겨울비 그친 저녁의 차가운 햇살 가려줄
이파리 하나 없는,
참 한심하게도 가난한 나무,
내가 그 나무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추워졌다.
너와 나, 숲으로 가자꾸나, 새야 (「새, 나무」전문; p64)
언젠가 그런 꿈을 꾼 듯하다.
나, 나무처럼 늙었을 때
역시 나무처럼 늙은 그대와 함께
늦은 오후 산책을 나서는 꿈.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저 나란히 늦은 오후와 이른 저녁 사이를 걷다가
늙은 나무 옆에서
어느 여행자의 카메라에 들어가는 꿈. (「오래 나이 먹은 꿈」전문; p123)
우기에는 비가 내려야 옳다
우기에 쏟아지는 땡볕은 옳지 않다
벼가 시들고 소가 여위고 개가 마르는 건 옳지 않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세상은 옳지 않다
쏟아지는 땡볕을 향해 방패 치켜드는
검은 피부를 향해 비웃는 것도 옳지 않다
눈물 한 방울 보태야 옳다 (「방패」전문; p125)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오는
어린 햇빛을 기억하라
틈만 있으면 뿌리내리고 덩굴손 뻗는
담쟁이 잎을 기억하라
산책 나오는 노인들보다 더 일찍 깨어
서로 간지럼 태우며 키득대는
어린 햇살과 담쟁이 잎을 기억하면
생에 놓은 거대한 심연 따위
가볍게 뛰어넘지 않겠느냐 (「틈」전문; p161)
흥, 어떻게 뿌리내린 생인데요
죽기는요
악착같이 기어서
저 높은 햇빛 세상 살아서 봐야죠 (「기어라」부문; p174)
오래 사랑한 자들은 서로 닮는다고?
그리하여 오래 사랑한
꽃과 벌, 꽃과 나비, 꽃과 등에,
꽃과 풍뎅이까지 서로 닮는다고?
잎들 다 똑똑 떨어져 나가도록
꽃잎 너덜너덜해지도록
사랑 찾아오지 않은 저 꽃은
누구를 닮았는가?
하필 장마에 태어난 죄에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오래 외로운 자들은
누구를 닮아야 하는가? (「꽃이 피는 방식에 관하여 3」전문; p189)
종종종 한 시절 살다간 발자국들
저리 고운데 아직도 매달려들 있느냐
집착이라 욕먹고 천하다 구박받던 한 시절
이제 다 지나갔으니
툭 놓아버리면 편해질 것을
훨훨 가볍디가볍게 날아갈 수 있을 것을 (「흔적」부문; p203)
날마다 죽는 해
날마다 뭐 볼 거 있다고 모여드는가
날마다 죽어가는 생 확인하며 서럽기만 할 것을
죽어야 아름답기 때문이지
죽어야 또 살아나기 때문이지 (「선셋 포인트」전문; p230)
모든 흐르는 것들은 덧없다
흐르지 않는 것이 세상에는 없다
덧없는 것들도 모이면 무거워진다
무겁지 않은 기억은 없다
구름, 흩어져 있어도 좋을 텐데
자꾸 모인다
기억, 꼭 그 자리에서 덧나
피고름으로 터진다 (「구름, 기억」전문; p235)
플라타너스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버짐 퍼진 채로
쑥쑥 키만 자라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섯 손가락 닮은 봄이파리
비 오면 우산 되던 여름잎
방울방울 대롱대롱 따고 싶었던 겨울씨
그렇게 얼른얼른 쑥쑥 자라서
무성하게 그늘 던지고
장난감 선물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방울도 되어주고 총알도 되어주고
그러고 싶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버짐 온몸에 퍼져도
빼빼 말라서 키만 커도
플라타너스로 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착한 나무로 살고 싶었던 시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플라타너스」전문;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