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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등록일 : 2009-06-15 19:50

육칠십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문학소녀라면 한번쯤 미치도록 빠져들어
자기 분신을 발견하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을 전혜린. 여성 법학도요
독일문학가로서 두권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 로움을 또다시>를 남기고 서른한살에 요절한 그는 30여년이 흐른 지금
에 도 여전히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소녀시절부터
전혜린의 가슴에 자리잡았던 명제 ‘절대 평범해선 안된다’가 그대로 실현
된 셈이라고나 할까.
전혜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삶을 어느 만큼 신비화시켰고 숱한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냐 아니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자살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 닐지 모른다.
그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되뇌었고, 설령 계속 살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을 테니까.
전혜린은 일제시대 중반 부유한 관리의 맏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아버지가 사다주는 책을 마음껏 읽으며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워낙 여학생이 드문 데다 도통 남의 눈을 의식
하지 않는 거리낌없는 행동, 경탄스러울 만큼 예리한 두뇌 때문에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귀국한 전혜린은 여자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는 완고한 전통을 깨뜨리고
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서울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격찬을 들으며,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곱살짜리 딸 정화를 남긴 채. 소설을 쓰겠다 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서.
그가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권태와 광기였다. 광기일 만큼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태로운 일상. 전혜린은 그
둘의 충돌 한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다. 맹렬하게 삶에
매달리는가 하면 다음 순간 허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양 극단을 무수히
넘나들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고 하루에 커피 15잔을 마셔야
정상이 될 만큼 그의 심장은 약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는 명제가 결혼해서 아 이 낳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삶을 못견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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