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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가든 등록일 : 2007-10-25 13:25

에쿠니 가오리의 1994년작품인 <홀리 가든>이 왜 이제야 번역되었는지 의문이다. 아마도 최근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본 문학에 편승한 덕도 있으리라 본다. 소담출판사는 그간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몇 권 출판 했는데, 아무래도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누렸던 작품을 위주로 번역을 해왔던 게 사실이다. 돌아보면 <반짝반짝 빛나는(1991년 작품)>이나 <낙하하는 저녁(1996년 작품)>, <냉정과 열정 사이(1999년 작품)> 등은 모두 90년대 작품들이다. 한국에서 번역되기까지 거의 10여 년이 걸린 것이다. 최근엔 <웨하스 의자(2001년 작품)>등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도 나오는 건 에쿠니 가오리의 한국에서 인기를 생각하면 고무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실정에 느닷없이 1994년도 작품인 <홀리 가든>이 출간 된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가을이고 거기에 어울리는 작가가 에쿠니 가오리라고 한다면 <홀리 가든>을 선택한 출판사 기획팀의 고민도 눈에 보일 듯 선하다. <홀리 가든>은 가을에 읽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봄에 읽는다면 춘곤증 때문에 노곤해서 잠이 올 것이고, 여름에 읽는다면 뭔가 가슴이 시원스럽지 못해서 답답할 것이다. 겨울에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쩌면 시린 가슴 때문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엔 시쳇말로 좀 이상한 성격의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주인공들의 성격은 대부분 정상적인 것과는 약간 비껴나간 상태다. 하지만 소설 안에서 그런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에 나오는 게이가 그렇고 심지어 <호텔 선인장>에는 ‘모자’와 ‘오이’라는 정말 외계인 같은 설정의 이들도 나온다. 그나마 <냉정과 열정 사이>는 약간 정상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준세이’와 ‘아오이’ 역시 너무나도 냉정하거나 비약적으로 열정적인 사람들이라 전혀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물론 영화에선 많이 희석된 상태로 나왔지만!)

<홀리 가든>에 나오는 ‘시즈에’와 ‘가호’ 역시 이상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한 친구지만 또 한편으론 상당한 거리를 두고 견제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가호’는 전혀 그래 보일 것 같지 않은 성격인데도 5년 전 실연의 슬픔 때문에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 ‘시즈에’ 역시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세리자와’라는 유부남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게다가 이들 사이에 있는 ‘나카노’나 ‘쇼노스케’는 어떤가. 그들 역시 ‘가호’를 따라다니는 충견(忠犬)이라고 묘사되거나 ‘시즈에’의 남자친구 얘기를 잘도 들어주는 또 다른 남자친구로 등장한다. 이렇듯 별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에쿠니 가오리의 상상 속에서 시종 툭툭 튀어 나온다. 그런 일상들이 슬프면서도 왠지 신선한 가을바람처럼 청명하고 투명하다.

차(茶)와 음악 문화가 발달한 일본이라서 그런지 일본 소설을 읽으면 많이 나오는 것이 음악이나(그 중에서도 재즈나 클래식) 차(茶), 음식 같은 것이다. <홀리 가든>도 크게는 홍차와 음악(클래식)이 소설의 전체를 끌고 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가호’는 평소 홍차를 마시며 매일 저녁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게 일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남자들과 러브호텔에서 섹스를 즐긴다. 홍차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홍차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커피도 그렇지만 홍차도 얼마나 숙성시키는가, 어떤 상황에서 생산되고 만들어지는가에 따라서 맛이 많이 다르다. 또 거기다가 우유를 넣어 마실 때 우유의 온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양을 넣어야 하는지도 홍차의 맛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가호’는 커피 보다는 홍차에 가까운 여자다. 깊은 슬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솔직하지 못하고 서툴다. 잘 못 우려내서 떫은맛이 나는 홍차다. 그럴 땐 다음부터 약간 다른 방법으로 홍차를 끓여서 계속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호’는 그 방법을 무모하게 계속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진짜 홍차의 좋은 맛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즈에’는 학교 미술 선생님이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장면이 소설에서 많이 나온다. 그녀가 듣는 음악은 베토벤이다. 소설에선 ‘전원 교향곡’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원 교향곡’은 베토벤의 여섯 번째 교향곡으로 시기적으로는 다섯 번째인 ‘운명 교향곡’과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두 작품은 성격이 대조적이다. ‘운명 교향곡’이 웅장하고 남성적인데 반해 ‘전원 교향곡’은 제목도 그러하듯 여성스럽다. 이것은 굉장히 목가적인 작품인데 클래식 비평가들은 이를 이유로 베토벤을 최초의 낭만주의 작곡가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시즈에’는 낭만주의자다.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유부남과의 불륜 상태에 있으면서도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다고 ‘가호’를 나무란다. 그런 ‘가호’에게는 ‘나카노’를 빨리 정리해버리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카노’에게는 ‘가호’가 간직하고 있는 옛 남자친구 사진을 갖다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가호’에게 다가갈 것을 조언을 한다.

사랑은 낭만적일까 현실적일까? 사랑은 차(茶)일까 음악일까? 가을이 되면 항상 스스로에게 되묻는 주제다. ‘가호’와 ‘시즈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누구나 다 같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소설 후반부는 ‘가호’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게 결론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아직 5년 전 남자친구를 잊었다고 볼 수도 없고 ‘시즈에’와의 문제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의 문제, 우정의 문제들을 가지고 ‘홀리 가든’에 피크닉을 떠날 것이다. 거기서 서로에게 홍차를 권하고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웃고, 떠들고,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고백할 것이다. 독자들은 그녀들의 남겨진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가을이 참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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