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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증인...골령골을 적신 여순의 피눈물

조희원 기자 입력 2020-11-20 07:40:09 수정 2020-11-20 07:40:09 조회수 0

◀ANC▶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는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집단 학살이 벌어진 곳입니다. 여순사건과 제주4.3 관련 수감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당시 14연대 소속 군인이었던 박귀덕 씨의 아버지도 그 희생자 중 한 사람입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을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다며, 대전으로 터를 옮긴 박 씨의 이야기를 조희원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VCR▶
◀INT▶
"쌀은 내가 매달 바꿔서 놓아. 교도소에서 몇날 며칠 굶겨서 학살했다고 했잖아.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먹어도 배가 고픈데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만주 사관학교를 나온 박귀덕 씨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봉기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봉기 당일인 19일 밤,
박 씨의 아버지는 휴가를 나와
본가인 광주에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대로 복귀하던 아버지는
14연대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붙잡혀 연행됐습니다.

◀INT▶
"할머니가 하루 저녁 더 자고 가거라. 안 됩니다. 상관이 있어요. (그러고) 새벽에 아침에 가셨어. 이렇게 아버지 또 올게, 또 올게 잘 있어, 아버지 또 올게, 잘 있어. 그랬는데 광주에서 잡혀버렸어. 광주에서 차를 타고 가려다가 잡혀버렸어."

그 후 1년 동안 가족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도
경찰들은 수시로 집에 들이닥쳤고,
온 가족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INT▶
"지서가 10분 거리밖에 안 돼. 끌려가서 뒤지게 두드려 맞고 와. 두드려 맞고 왔어. 빨갱이 집이라고 찍혀가지고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으로 온다니까, 경찰들이. 우리 집만 와. 신도 안 벗고 군화 신고 다 뒤져, 다 뒤져. 마음대로."

1년여 뒤, 아버지가 대전 형무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이 기적같이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면회가 허락된 건 단 두 번뿐.

아버지는 1950년 6월,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박 씨의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남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INT▶
"이산가족 만날 때 친정 엄마가, 그 때는 텔레비전이 없잖아. 그래서 남의 집 가서 봤어. 그 똑똑한 사람이 죽기는 왜 죽냐. 저리 북한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고 날새도록 봐. 거기 가서."

지난 2015년 박 씨는 광주 고향집을 정리하고
아버지가 묻힌 대전 산내골령골 인근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약 7천명 희생자가 잠들어 있지만
지금까지 고작 52구의 유해만 발굴된
골령골에서는, 올해 9월 말부터 다시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지금까지 120여 구가 추가로 발굴됐지만,
이리저리 흩어진 채 발굴되는 뼛조각으로는
신원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혼은 여전히
주변을 떠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박 씨는
매달 꾸준히 발굴 현장을 찾고 있습니다.

◀INT▶
"여기서 죽어야지. 죽으면 여기에 뿌려달라고 하려고. 나는 끝까지 아버지 곁에 있으려고. 영혼이라도 같이. 아버지 손 잡고 다니고..."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느덧 여든 살이 된 박귀덕 씨.

한 많은 세상을 살아온 박 씨에게
특별법 제정은 그 무엇보다 간절한
마지막 소원입니다.

◀INT▶
"우리 유족들 명예회복을 완전히 시켜줬으면 좋겠어. 그것이 소원이야. 다른 것은 소원이 아니고. 널리 알려서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을 시켰다고 정부에서 고개를 숙여야 해. 안 그래? (한을) 말 할 수 없잖아. 어디에 대고 말을 해."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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