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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증인'..."이름 비슷하다고 잡혀간 아버지"

조희원 기자 입력 2020-09-18 07:40:04 수정 2020-09-18 07:40:04 조회수 0

◀ANC▶
여순사건 당시 14연대의 본거지였던 여수에서는 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김우송 씨의 아버지 역시 경찰의 실수로 잘못 끌려가 희생당하고 말았는데요. 그 기막히고 원통한 사연을 들어봅니다.

여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특별기획 증인,조희원 기자입니다.
◀VCR▶
◀INT▶
"여순사건 나면서, 나는 참 더러운 세상을 살았어요. 가장이 아닌 가장이 됐지요. 친구들은 내로라하는 좋은 학교 나와서 다 여수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그랬는데..."

여수 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하는 섬, 금오도.

선녀가 내려와 놀곤 했다는 이 아름다운 섬은,
1950년 7월 그날,
6.25 이후 마을로 들이닥친 군경이
인민군 가담자 색출 작업을 벌이면서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INT▶
"여기 주둔하고 기관총을 놓고 총을 쏘면서 마이크로, 동네 사람들 다 나와라. 그래서 동네 사람들 다 모이게 한 것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뒤로 시체가 동네마다 떠다녀. 시체가..."

경찰은 김우송 씨의 아버지도 연행해갔습니다.

◀INT▶
"끌고 가니까 아버지 왜 이래 그러면서 울고, 어머니가 울고,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나 죄지은 거 없으니까 바른대로 이야기하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함께 끌려갔다
간신히 도망친 이웃 주민은
아버지가 수장됐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고작 열한 살에 가장이 되어버린 김 씨에게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가 왜 죽어야 했는지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INT▶
"농두렁의 풀 베고, 산에 가서 땔나무 만들어야지. 죽자니 죽을 새가 없었지. 놀 시간이 없었어."

아버지 죽음의 경위를 알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였습니다.

아픈 기억뿐인 고향을 떠나기 위해
무역선을 타려 했던 김 씨는
'빨갱이 집안'이라는 벽에 가로막혔습니다.

◀INT▶
"수첩을 내러 가니까 여수항만청에 가니까 수첩을 내니까 외항 불가라고 빨간 줄이 딱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왜 외항불가 되냐. 집안에 사상 가진 사람이 있네요."

알고 보니 여순사건 당시
인민군에게 단 한 번 길을 알려주었을 뿐인
자신의 사촌형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며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끌려갔던 그 날,
군경은 큰아버지를 잡으러 왔다가
이름이 비슷한 자신의 아버지를
잘못 연행해갔던 것이었습니다.

◀INT▶
"큰아버지가 유종이. 유일이, 유삼이, 유곤이. 유자 돌림이라서 사실은 유종이를 지서 순경들이 잡으러 와서 이름이 비슷하다고 아버지를 잡아가고... 물어보지도 않고, 묻지마 살인을 한 거야."

벙어리가 살고, 봉사가 사는 세상이니
낯선 사람에게는 길도 가르쳐주지 말라고
당부했던 아버지.

그렇게 숨죽이며 살았지만
결국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된 아버지.

김우송 씨는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INT▶
"지금 안 돌아가신 것 같아. 내일이라도 올 것 같아. 아직도 돌아올 것 같아. 그립죠. 왜냐면 나 힘들면 아버지 생각이 나."

72년 동안 품어온 김 씨의 소원은
단 하나뿐입니다.

◀INT▶
"나는 원이 아버지 명예훼손 한 것 보상받고, 우리 형제간들 참 취업도 못 하고 설움 다 받으면서... 그런 명예회복, 보상. 이것만 있으면 나 그냥 멍들어 있는 가슴이 조금 풀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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