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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1] 대를 이은 고통의 굴레

조희원 기자 입력 2020-09-11 07:40:10 수정 2020-09-11 07:40:10 조회수 0

◀ANC▶
여순사건이 이제 곧 72주기를 맞게됩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나 피해자들의 배 보상을 위한 법제화는 여전히 공허한 호소에 그치고 있습니다.

여수MBC가 여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보도기획을 준비한 배경입니다. 지금까지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유족들의 삶을 통해 이들을 위한 사회적 대책이 얼마나 시급한지 조명해 나갈 예정입니다.

여수MBC 특별기획 '증인',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여순사건이 발단이 돼 아버지와 아들이 2대에 걸쳐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기구한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조희원 기자입니다.
◀VCR▶
◀INT▶
"살아온 게 참... 나는 인생이라는 게 없잖아요. 36살부터 법의 쇠사슬에 얽매여서 그 누명을 벗겠다고..."

올해 일흔 살이 된 김양기 씨.

벌써 34년이나 지났지만, 1986년 2월,
그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INT▶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나자 그러고 만나러 나갔는데 숙부가 안 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왔어. 와서 숙부가 비행장에서 쓰러져서 광주 대학병원으로 지금 가셨다고, 빨리 광주로 내려가자는 거야."

그러나 택시가 도착한 곳은
대학병원이 아닌 광주 505 보안대였습니다.

◀INT▶
""아, 이놈이 김양기야?" 그러면서 양쪽으로 탁 낚아채더니 지하실로 끌고 들어가. 그날 저녁부터 잠을 안 재우는 거야. 지켜 서서. 앉혀 놓고."

43일 동안 이어진 가혹한 고문,
김 씨는 간첩이라고 시인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C.G.1) 여순사건 당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김 씨는 아버지가
보도연맹 가입자였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실적에 눈먼 수사관들에게 김 씨는
간첩일 뿐이었습니다.

◀INT▶ (C.G.2)
"나를 고문하던 걔들이 "너희 아버지는 여순사건에 가담해서 네가 너 아버지 원수 갚으려고 일본 가서 재일교포, 아니, 조총련에 포섭돼서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그런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결국 5년의 억울한 징역을 살고 나온
김 씨의 삶은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첩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두려워한
친척들은 등을 돌렸고,

고문의 후유증과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습니다.

◀INT▶
"췌장도 들어내고 없죠. 나는 쓸개 빠진 놈이야. 그렇게 웃고 살아. 쓸개가 없어서."

화병은 농사일로 다스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 없는 설움을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말았다는 죄책감은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INT▶
"내가 잡혀갈 때 우리 아들이 6살. 우리 딸이 4살. 아빠 사랑을 받아야 할 무렵에 아빠가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단 말이야.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파. 내가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지난 2009년, 김 씨는 23년을 투쟁한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보도연맹 가입자라는 이유로
한밤중에 끌려간 김 씨의 아버지는,
재판 기록조차 없이 처형당한 까닭에
재심을 해볼 수가 없습니다.

고작 28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버지.

그러나 국가는 아직,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음악)
◀INT▶
"여순사건이 옛날 과거의 사건이 아니에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에요. 그렇잖아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니까... 여순사건 특별법이 이번에는 틀림없이 통과가 돼서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추모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면..."

김 씨의 여순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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