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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 '김의기'-R

김철원 기자 입력 2016-05-17 07:30:00 수정 2016-05-17 07:30:00 조회수 2

(앵커)
5.18이 오늘날의 역사적 위상을 갖추게 된 데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점점 줄고 있고 5.18 역사에서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5.18 36주년을 맞아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희생된 이들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첫 순서로
경북 영주 출신의 대학생 故 김의기씨를
김철원 기자가 소개합니다.

(기자)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이 진압된 지 만 사흘이 지난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한 청년이 계엄군 탱크 사이로 떨어져 숨집니다.

서강대 무역학과 76학번 김의기씨가 광주학살을 알리는 전단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뿌리고 떨어진 것입니다.

(인터뷰)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광주의 죽음 앞에서 또는 광주를 기억하자고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그런 분들의 죽음 앞에 응답을 안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게 한국 민주화를 이끌어낸 힘입니다."

(스탠드업)
당시 6층에서 떨어진 김의기 군이 피를 쏟으며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계엄군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기보다는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줍는 데만 신경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농민운동가를 꿈꾸던 김의기씨는 1980년 5월 광주 북동성당에서 있었던 함평 고구마 농민 투쟁 승리 기념식 참석을 위해 광주에 왔다 계엄군의 학살을 목격했습니다.

(인터뷰)윤기현/동화작가
"광주가 고립되지 않게끔 같이 동조해서 다른 지역에서도 같이 시위를 하고 싸울 수 있는 이런 부분이 훨씬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니까 올라가서 하라고 그런 거죠. 그랬더니 김의기씨도 동의를 하고 올라가겠다고..."

5.18이 끝난 지 사흘만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다 숨진 그의 죽음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인터뷰)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김의기가) 광주에서 수백명이 학살당하고 있는데 동포인 당신은 뭐하고 있습니까라고 계속 묻잖아요. 그러면 '나 그 때 숨어 있었다. 내가 너 만나면 부끄럽지 않으려고 내가 그 다음에는 열심히 살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광주MBC는 취재 과정에서 김의기씨가 생전에 남긴 신동엽시인의 '금강'을 읊은 육성녹음 테잎을 입수했습니다.

(녹취)故 김의기 씨 생전 육성/신동엽 서사시 '금강'

1894년 3월 21일.
전봉준이 영솔하는
5천 농민이
동학농민혁명의 깃발
높이 나부끼며
고부 군청을 향해 진격했다,

머리마다 휘날리는
노랑 수건,
질서 정연한
대열, 여기저기
높이 펄럭이는
깃발,

물리치자 학정
구제하자 백성

서강대 후배들은 해마다 그의 이름을 딴 '의기제'를 지내며 선배의 뜻을 기립니다.

(인터뷰)서해나/서강대 신방과 15학번
"광주항쟁을 서울에서 처음 알렸던 서강대 동문이신 김의기 선배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학교에서 의기제를 하게 되는데 그걸 기획하기 위해서 뜻을 모아서 (만나고 있습니다)"

항쟁이 진압된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다 최초로 숨진 김의기 씨.

3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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