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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MBC

시청자의견

강산은 푸르렀고 아름다웠습니다

2002년 07월 30일 00시 00분 00초 2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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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원모집 계획은 없습니다.
변동사항이 생기면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여수문화방송에서는 사원모집이나...알바모집안하나여?
┃궁금해서여...
┃답변부탁드려여이 글은 지난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고 돌산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후반부에 엠비시 문화방송을 듣지 않았던 기록도 나오는데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라도 저는 지금은 엠비시 방송을 즐겨듣고 있습니다.

1. 자전거로 돌산대교를 건너다
아홉시가 조금 넘어 우리의 본부인 삼천리에 도착했다. 반가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의 활약상을 듣고 격려 차 오신 여수 싸이클연맹 김준안님과 최규채님과 신입회원으로 김용섭님, 김재창님, 김정철님이 오셨다.

내가 출근하며 달렸던 아랫길을 타고 남산동 어시장을 거쳐 돌산대교 앞에서 집결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다리로 진입했다. 다리를 한번도 걸어서 건너보지 않았는데 그것도 자전거로 건너게 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맑고 푸른 바다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우리 동아리 "두발로"가 베푼 선물이었고 위력이었다.

대교를 건너서 우리는 거침없이 순조로운 길을 갔다. 완만한 굴곡은 흐릿한 날씨만큼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안겼고 우리를 지체하게 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 휴식 장소인 무술목 전라남도 수산종합관에 도착했다.

그곳은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벌써 주차장에는 상당히 많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유명한 관광지답게 전국 각지의 번호판을 단 차들이 그곳으로 오기도 했고 방죽포 해수욕장과 향일암 쪽으로 수도 없이 달려갔다. 두 번이나 갔던 한적한 화양면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모장마을을 지나는데 언제 나갔다가 들어오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담한 어선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 깃발을 나부끼며 송대관의 네 박자를 신나게 밟으며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평사길을 타고 길을 재촉하여 항대마을 부근의 허리를 구부리면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바닷가에서 "바다를 봄시로" 휴식을 취했다. 흐릿하던 날씨는 점점 개이고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 썬탠크림도 바르지 않은 반팔과 반바지 상태는 투어 후에 화끈거림으로 시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내리에서 좀 쉬어볼까 하는 심산으로 오르막에선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하여 달렸고 내리막에선 가속도를 붙여 보았다. 그런데 기어를 너무 급작스럽게 변경시켰는지 쇠사슬(체인)이 궤도에서 이탈되어 있었다.

어제 밤 잎새주 복용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감지한 최성용님이 나의 뒤에서 정신적인 부축을 하며 따라오고 있었는데 역시 자전거 고수답게 신기한 공구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공구라기보다는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예쁜 장난감 같았다.

그의 도움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군내리에서 낚시로 유명한 돌산의 마지막 마을인 성두로 가는 대부분의 오르막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달렸다. 마을과 바다와 그리고 논밭을 가로지른 도로를 신기마을의 어린이들이 걷다가 14명이나 되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신기했던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기마을에서 작금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는 길었고 그래서 힘들었다. 허리를 굽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바다는 이제 낭떠러지 저 만치 발아래 푸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송도와 이름 모를 섬들이 툭 터진 끝도 없이 뻗어나간 수평선의 지루하고 밋밋한 느낌을 완화시켜주었고 또한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지역도 드물 것이었다.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아니면 그 경치에 발목이 잡혔는지 애마들을 눕혀놓고 "바다를 봄시로" 쉬고 있었다.


2. 낚시마을 작금, 성두로 가는 길
우리가 쉬웠던 곳은 횡간리가 보이는 언덕이었는데 그 아래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군부대라기보다는 근사한 별장 같아 보였다. 막사는 방갈로 같았고 초소는 예쁜 공중전화부스를 닮아 있었다.

하기야 군인들로 보면 그것이 아무리 멋진 시설이고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다 하더라도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경계를 펴는 시간은 지루하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 의자를 몇 개 놓아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비번일 듯한, 어쩌면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일 것 같은 병사 한 명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군대생활은 경치를 꼽으라면 조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비무장지대와 한탄강이 있는 강원도 철원에서 했었다. 분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은 덥고 겨울이 몹시 추웠고 고된 훈련과 매복에 의한 힘들었던 기억 이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훈련을 하다가 목이 마르면 그냥 아무 곳에서나 퍼서 마시도 좋았을 한탄강이 그렇게 아름다웠고 봄이면 높이를 정해놓고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진달래 (개화선)開花線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또한 가을이면 앞다투어 남하하는 불타는 단풍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 때는 보이질 않았을 것이다.

좀더 여유를 가지고 조국을 지키며 3년 동안 삶의 터전으로 마련해 준 곳을 더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것을....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하기야 그 스물 네 살의 나이 때 마흔 세 살의 생각을 한다면 그것도 될 말이 아니었다. 군대생활을 잠시 떠 올리며 그 병사가 읽고 있는 것이 "김초혜"님의 시집 같은 것이었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나섰다.

오르막길은 계속되는 가운데 작금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이름난 쉼터인 "언덕에 바람"이 보였다. 늘, 바람의 언덕인지 언덕의 바람인지 혼동해 왔던 나는 이 기회에 그 상호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언덕에 바람"이라고....

아직 이른 시간인지 손님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주인인 듯한 두 분이 앞에 가꿔놓은 잔디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머물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금 마을로 내려가는 내리막이 나왔다. 신기 마을에서부터 거의 오르막을 달려온 보상을 한꺼번에 맞이한 듯했다.

작금은 돌산의 낚시 중심지답게 한적한 어촌마을과는 달리 상당히 번화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위하여 그곳을 찾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했고 길가로 늘어선 낚시와 관련된 상점이 그러하였다.

엊그제 일어난 사고 여파인지 다시 불어오는 태풍의 영향인지 평소에 비해 낚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늘 큰 사고가 일어난 후에야 안전불감증을 후회하고 경계를 펴는데 언제나 그랬으면 귀중한 인명의 손실은 없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지난주에 다친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뼈까지 시큰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터라 오늘은 그 무엇보다도 안전에 유의하여 사고 없는 여정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에 성두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도달했는데 그 대목에만 서면 돌산실고에 근무하던 시절의 옛 제자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선생님, 겨울 아침에 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꼭 이 지점에서 해가 떠오르는데 기사님이 일부러 차를 멈춰주셔서 모두 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곤 해요. 그럼 얼마나 숨이 막히던지...."

그 제자가 졸업을 하고 집에서 부모님을 잠시 도우며 바다 일을 할 때 찾아가서 들었던 그 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돌산 동부의 끝인 낚시마을 성두에 다다랐고 눈앞엔 그 유명한 율림 정상으로 가는 "율림치"가 완고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3.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율림고개로 접어들다
사실 출발하기 전에 총무님으로부터 안내를 받았기도 했지만 과거 88년부터 90년까지 "섬집아기"를 부르면서 그곳 돌산 땅에 있는 돌산실고(지금은 여수실고로 개칭됨)에서 근무했었고 또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 심심찮게 찾았던 곳이어서 지형은 충분히 숙지된 상태이긴 했다.

누구든 승용차를 가지고 유람 가듯 가는 길이라면 여정을 그릴 것도 없고 말 것도 없지만 자전거를 타고 갈 때, 그 지형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 다른 곳은 몰라도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율림고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두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쏜살같이 내달려 조금이라도 올라가 보려고 애를 썼는데도 처음부터 무리였다. 속도를 내서 올라가려는 것을 포기하고 천천히 그리고 장중하게 오르기로 마음먹고 최 저단의 기어로 변속하였다. 애초에 나의 목표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산하를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에 느리게 가는 것이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지금 비록 자전거를 타고 아직은 여수에 머물러 있지만, 내가 느끼는 초록의 7월 조국 산하에 대한 예찬을 얼마나 더 아름답게 얼마다 더 짙게 그려지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머지 않아 단풍으로 불탈 숲들을 조금이라도 더 푸르고 푸르게 그려내고 싶어서 속도를 내지 않고 달리는 것은 당연했는지 몰랐다.

그만큼 천지를 뒤덮은 산과 바다 뿐 만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과 길가의 가로수, 그 아래서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잡초나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 돌멩이들도 조국을 지탱하는 소중한 자산들이었고 나에겐 그려 내야할 귀중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어린 기웅이가 힘이 들었던지 가던 길을 쉬었고 우리의 묵묵한 도우미 하성용님과 지존님은 기웅이의 안장을 조절해주고 또 힘을 북돋워 올라오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도 아름다운 경치를, 그것도 해질 녘에 만나는 그 환상적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어서 슬쩍 바라본 발 아래의 성두마을과 앞 바다와 그 앞의 섬들은 신의 은총이 아니면 그 모습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착각이 들게 하였다.

한 차례의 격정적인 언덕과의 전쟁을 치르고 나니 고개는 조금은 완만한 경사를 내주며 나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하는 아량을 베풀어주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식을 낳아 기를 때 부대낀 것이지만, 역시 아무리 좋고 일리 있는 충고나 꾸중도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면 그 충고나 꾸중은 약이 되기보다는 독과 같은 증오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완만한 경사에 접어들면서...

부드러운 곡선은 어디에서든지 무난하게 환영받고 시선을 끌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원만한 인격도 그럴 것이다. 교사가 되어 신안군에 있는 어느 섬으로 발령 받아 가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목포로 나가는 선창까지 따라오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넌 선생님이니까 어질고 인자해야한다. 아이들이 속 상하게 해도 함부로 화내지 말고 너그럽게 받아들여야한다"

높은 곳으로 가고 싶었고 많이 가지고 싶어했던 젊은 날이었다. 그러한 것들을 꿈꾸었다는 것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잡아 도로(徒勞)한 일은 없었는가? 되돌아 볼 일이기도 했다.


4. "드세요, 예뻐서 드리는 것입니다"
완만한 곡선은 더 없이 좋은 선물이었고 힘을 얻은 나는 정상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제 완만한 경사는 거의 평지로 보상해주었고 비교적 험준한 산에다 그렇게 긴 평지 같은 도로를 만들어낸 기술에도 찬사를 보내며 드디어 동쪽과 서쪽의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정상에 다다랐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1월 1일 새벽에 텔레비전에도 소개되어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일출을 자랑하는 향일암의 바다와 연결되는 율림마을의 앞 바다가 또 다시 발생한 태풍의 영향으로 흰 이를 드러내듯 넘실대고 있었고 성두 앞 바다는 섬들과 조화를 이루며 더없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여름날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미리 와 있던 일행들은 벌써 여장을 풀고 성취감에 젖어 감회 어린 표정으로 발아래 펼쳐진 수려한 경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지 않아 먼데서 오신 손님들, 꽃순이님과 자운영님과 동행하신 김자윤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도 있었다. 부지런한 산자, 오병종님은 사람 숫자에 맞춰 자리를 배치하고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늘 그런 모습으로 두발로를 이끌고 계시는 우리의 수호천사이기도 하다.

김선생님이 도착하시고 온라인으로만 교류했던 존재들이 실제로 교감하는 정겨운 순간들이 이어졌고 서로 아이디와 화면으로만 보았던 얼굴들을 연결시키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건설현장의 사무실로 이용되는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만든 간이 음식점인 "정상휴게소"에서 김밥, 콩국수, 칼국수와 삼치회로 너무나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늘 좋은 정보로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는 지존님의 손님들에게 음식을 권하는 재치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에 훌륭하고도 넘쳐났다.

"드세요, 예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선생님은 "김치"가 아닌 "위키"로 사진을 찍어주시고...

점심을 먹고 방죽포길, 즉 포장도로를 갈 사람과 산악투어를 할 사람을 나누어서 오후의 일정에 들어갔다. 나는 당연히 산악코스였다. 나중의 내리막길에 비하면 지금까지 가본 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상당히 먼 곳까지 포장이 되어있었고 숲은 신선했고 아름다웠다. 산을 하나 넘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한 마을들이 발 아래로 따라왔다. 그러니까 마을의 뒷산이 우리가 넘어가는 큰산의 각각의 봉우리였던 것이다.

산은 성두에서 작금, 작금에서 대복 대복에서 신기....그리고 군내리는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의 목적지인 죽포로 이어져있었다. 말하자면, 여수쪽에서 방죽포나 향일암 쪽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할 죽포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로 내려가기 전의 언덕 꼭대기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돌산에서 가장 큰산을 관통하는 임도를 탄 것이다.

지난주에 갔던 천성산도 바다도 보이고 여수시내도 보이고 봉화를 피웠다는 봉화산도 보이는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라고 했는데 안개에 휩싸여 그 아름다움에 대해 실감을 하지 못했는데 산을 하나 하나 넘을 때마다 달라지는 풍광은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노래한 조상들의 지혜로운 묘사였음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앞서 네 분이 가시고 될 수 있으면 하나라도 더 눈 속에 기억 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담으려고 전망이 좋거나 예쁜 들풀이 있는 곳이면 자전거에서 내렸고 가파른 언덕은 미련 없이 내렸다.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좀 더 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산 속에서의 내리막길은 경치를 완상(玩賞)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전봉산에서 보았던 싸리나무에는 늦게 피었던지 아니면 오래도록 달려 있었던지 아직도 자줏빛 꽃이 군데군데 달려있었고 자주 비가 내려 습해진 길가의 잔디엔 형상도 크기도 처음 접하는 예사롭지 않은 버섯도 여러 개 솟아있었다. 도로를 내기 위해 잘라놓은 절개지를 보니 이끼가 끼어 있었는데 도로가 개설된 지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5. 산 속에서 만난 선한 목자
언젠가 출근길에 가막만에서 나의 출근길에 만나 바깥쪽으로 나를 유도하고 위험한 안쪽을 달리셨던 우두택지지구의 다인(?, 이것 잘못되어 있으며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합기도장의 박관장님이 나의 안전을 염려해서 동행해주셨다. 그 때도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산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만나본 그분은 무술인이라기보다는 선한 목자이셨다.

우리는 쉬면서 산길을 갔다. 이 길을 먼저 가보셨기도 했고 또 가끔씩 혼자서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형을 잘 설명해주셨고 늘 내가 쓴 글을 잘 읽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둘만 남은 산 속에서는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서로 나이를 물어보았고 하는 일을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고 서로를 둘러싼 주위의 연관된 사람들을 거론했고 일상을 살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자전거를 왜, 타게 되었는가도 말할 기회도 가졌다. 타고 가기 좋은 상태의 길에 더구나 완만한 내리막인데도 아까워하지 않고서...

나보다 1년 연상이셨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그래서 일요일 투어에 못 오신 이유를 알게 되었고 이전에는 술과 담배를 하셨는데 지금은 하지 않고 계셨다. 난 담배는 끊었는데 술은 아직 끊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경험을 말씀하셨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혼자 있던지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얼마 전부터 나도 술은 "영혼을 흐리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을 느끼고 조금씩 절제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난해 같았으면 광주에 오자마자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고 난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곤 했는데 올해는 모두 사양했다. 그리고 공부도 더 많이 해야했다. 지겹다고 생각되는 공부가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해야했다고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내리막길이 대단히 가파르고 위험하다며 몇 번이고 당부하시고 관장님은 먼저 내려가셨다. 처음의 내리막길은 순조로웠고 상쾌했고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6. 목적지가 보이고 멋진 노래가 나오다
삼분의 일 정도를 남겨둔 마지막 산길을 앞두고 바라본 죽포 마을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마을이 아닌 것 같았다. 정 반대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죽포로 가기 전에 그 마을의 언덕에 설 때마다 저 만치서 우뚝 솟아 있는 산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라보기만 할 산처럼 여겨졌는데 그 산 속을 자전거를 타고 누볐고 그 산 속에서 늘 서서 그곳을 바라보았던 언덕을 보고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초록을 이어준 논들이 더 없이 정겨워 보였고 그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논길은 산악의 험한 길에 조금은 질린 나에게 더 없이 포근하게 다가왔다. 눈을 돌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도저히 오르고 내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길이 나 있었고 우리는 그곳을 헤쳐왔던 것이다. 동그랗게 난 절개지위에서 도열하듯 피어있는 나리꽃을 보면서 관장님과 난 마지막까지 안전에 유의하자며 서로를 격려하고 또 내달렸다.

정상에서 보면 내리막이나 오르막이나 다 똑같이 물이 흘러갈 수 있을 텐데 율림에서 올라가는 도로는 배수가 잘 되어서 길의 상태가 양호했지만 죽포로 가는 내리막은 상황이 달랐다. 정상부근은 그렇지 않았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은 배수로 역할을 했음에 분명했다.

길옆에 있는 배수로와 길의 높이가 거의 비슷했고 길은 폭격 맞은 건물이 앙상하게 뼈대만 드러내듯 날카로운 돌들만 도처에 도사리고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지난주에 있었던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난 번 사고는 산길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길에서 급경사를 너무 조심하다 일어난 사고였는데 더구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돌들은 너무나 큰 위협요소였다.

그렇게 위험한 길에 도움이 되는 것은 라디오였다. 사실 라디오를 즐겨듣는 난 주로 한국방송의 뉴스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산자님을 만나고 나서 문화방송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즉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해서 듣기로 했다.

산길에 접어들고 나서부터 산자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박형옥의 음악이 있는 세상"을 들었다. 음악을 특별히 즐겨듣지 않은 나 자신인데 세상사는 이야기와 추억의 팝송을 많이 들려주는 그 프로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 날은 피서가 주제였는데 여름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는데 그곳으로 피서를 가던지 아니던지 바다가 생각날 것이라며 프로그램을 진행해갔는데 어느 수필가의 바다에 대한 단상을 읽어주는데 글이 너무나 좋았다. 걸음을 멈추고 받아 적고 싶었는데 기다리시는 회장님이나 회원 여러분들에게 너무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서 자전거 위에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가 그것을 제작한 PD분이나 작가분께 부탁해서 소개해드리고 싶은데 가능할지...

많은 음악이 나왔는데 두 가지가 인상깊었다. 하나는 여수여고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설악산으로 수학여행갈 때 대 유행해서 버스 속에서 무척이나 많이 들었던 "터치 바이 터치"였고 하나는 "프랭크 시내트러"의 "마이웨이"였다. 앞의 것은 노래에 대한 설명 없이 들려주었던 것인데 뒤의 것은 내가 몰랐던 사연을 말해주었다. 노래에 워낙 문외한인 내가 그 노래에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했는데 혹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들은 대로 간단히 대강을 이야기 해보겠다.


7. MY WAY와 한 달 기념파티
MY WAY는 원래 프랑스의 샹송으로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샹송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노래가 주목을 받은 것은 영어로 불리워지고 나서부터인데 아카데미상과 그레미상을 수상한 만능 연예인인 프랭크 시내트러가 은퇴를 선언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싱어송라이터 "폴앵커(카?)"가 영어로 번안하여 헌사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이렇듯 화려한 인생역정을 건너온 대 배우의 길과 비슷한 내용을 가진 노래를 그 주인공이 불러서 유명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었습니다"---DJ 박형옥---

먼저 이름을 잊었는데 샹송으로 흘러나왔고 산길이 끝나고 나서 평탄한 논길로 접어들자 마자 프랭크 시내트러가 부른 MY WAY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 노래를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논길이 시작되려는 곳에서 바라본 산길은 너무 아득했다.

"저 길을 타고 내려왔단 말인가?"

그러한 상념에 젖어 있는데 그 노래가 나와서 얼마나 절묘했는지 모른다. 마이웨이는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들으면 더 없이 좋겠지만, 어떤 역정을 지나오고 나서 들어도 참 좋을 듯 했다.

마이웨이가 끝나자마자 지체없이 체널을 "이종환과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고정했다. 논길을 빠져나와 죽포마을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하성용님과 만나 또 다시 시작된 길고 긴 언덕으로 가는 고행 길로 접어들었다.

언덕을 넘어 이제 반대로 저 멀리에 있는 우리가 넘어온 산들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씻고 나서 계동길을 타고 무술목을 거쳐 관장님의 체육관이 있고 제 3청사가 있는 돌산 우두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회장님께서 간단한 다과로 두발로 창립 한 달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어주셨다.

관장님의 체육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돌산대교를 건넜다. 대교에서 남은 필름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데 먼데서 오신 손님들을 태운 김선생님의 차가 지나갔고 다시 손님들과 스치듯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당직을 위해 사무실로 가시는 회장님을 비롯하여 우리들은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다음 주를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8. 물 한 모금과 회장님의 전화. 끝
집에 돌아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가지 못한 채경이를 데리고 가막만으로 갔다. 채경이는 처음 가본 길이라며 참 좋아했고 어렸을 때 타본 솜씨라며 두 손을 놓고 타기도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탈 때 기어변속도 잘 했고 다음에는 데려가도 좋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그 길을 가면서 언덕 위에 있는 "모이리"라고 하는 레스랑인지 카페인지 모를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둘이서 올라갔다. 바다로 접한 곳에는 소나무가 자라있었고 그 틈으로 바다가 보였는데 전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낙조를 볼 수 있기도 했다.

야외에 자리가 있어서 잠시만 앉았다 가려는데 직원이 다가와서 차를 마시지 않을거냐고 물었다. 우리의 복장이 차를 마시러 온 사람 같지 않았나 보다. 지갑이 배낭에 있었는데 그것을 벗어 던지고 단독군장 하듯 나왔으니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 직원은 뜻밖에 이렇게 말을 건넸다.

"시원한 물 한 잔 드릴까요?"

얼마나 반가웠는지...나야 목이 말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는데 채경이도 성의가 고마워 억지로라도 다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후한 인심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데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마도 회원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하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았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나에게 사진을 찍어주시려다 안경이 깨어지는 일까지 당하셨는데 전화까지 주시고....그러한 보살핌과 책임감이 우리 두발로가 일취월장 발전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던 돌산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