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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증인]인정받지 못한 희생...처절한 요구 "명예회복"

◀ANC▶

여순사건에 대한 지난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의 수는 모두 천102명입니다. 당시 기록을 찾지 못해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수천 명이 더 있었는데요.



순천 동산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성의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기획 증인, 아들 이기용 씨를 만나 특별법 제정이 꼭 필요한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조희원 기자입니다.

◀VCR▶

[세월이 갈수록 애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 스승의 날을 맞아 그 망극한 정을

이 비에 새겨 올립니다.

- 2012년 동산초등학교 20회 동산회 세움]



이기용 씨의 가족묘에 세워진,

아버지 이성의 씨의 제자들이 만든

사헌비입니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 동산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이 씨의 아버지는,

천생 교사였습니다.



◀INT▶

"할머니 말이 그래. 선생 되고도 십 원도 안 갖다주고 제자들, 없는 제자들 그런 애들 도와줬다고 그래. 아버지가 교문에 들어가면 선생님 오신다고 이렇게 달려들고 그랬대."



그러나 행복했던 교직 생활은

3년밖에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아버지를 '좌익 세포원'이라며

경찰에 제보했던 겁니다.



◀INT▶

"순천경찰서에서 좀 나오라고 통보가 온 모양이야. 자기는 죄 없다고 자기 발로 경찰서로 갔대. 그런데 그 길로 아버지가 안 와버려."



이 씨의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듬해 할아버지가 숨졌고,

어머니마저 2년 뒤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

삼 남매는 홀로 남겨진 할머니와 함께

남의 집 더부살이를 전전하며 자라났습니다.



이 씨는 여순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지만,

얄궂게도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게 했다고 말합니다.



◀INT▶

"우리 할머니하고 그 할머니하고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도 여순 때 돌아가셨고, 여기 할머니 (아들)도 그때 돌아가셨고. 그것 때문에 인연이 된 것 같아. 그래서 그 할머니가 그냥 오케이 해서 결혼했어."



지난 2010년 1기 진실화해위 활동 당시

이기용 씨는 피해 신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씨의 아버지는

수형 기록이나 재판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INT▶

"그때 당시 제자들이 두 명 왔어. 증인으로. 조사하는데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들은 소리만 했지. 그런데 (기록이) 찾아도 없어. 없으니까 기각이 되어서..."



그러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대전형무소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물을

접하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INT▶

"대전에서 만든 책이 있더라고. 그 책이 한 권 왔어. 그 책에 적혀져 있더라고. 주소랑 정확하게 다 맞아. 교직에 있던 것까지. 그때 유족이 없어서 유족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책에 나와 있더라고."



이후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

지난해 순천경찰서와 광주기록원에서도

잠들어 있던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낸

이기용 씨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만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INT▶

"특별법을 해야지. 제대로 해서 이런 억울한 사람들 전부 다 명예회복도 시켜주고 보상도 해줘야, 원칙으로 생각해. 그런 말 말고는 할 말이 뭐 있어. 아버지를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하겠어? 안되지.. 그래."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조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