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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특별기획 증인..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12살 소년

◀ANC▶

72년전 여순사건당시 여수와 순천, 구례, 고흥 등지의 사람들은, 어제는 인민군에게, 오늘은 진압군에게 시달리며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살았던, 고흥 포두면 토박이인 송병섭 씨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여수MBC 특별기획 증인, 조희원 기자입니다.

◀VCR▶

◀INT▶

"바다에서 살아버려. 배가 있으니까 노 젓고 그냥 쌀 사가지고 물 한 통 실어서 한 며칠씩 있다가 또 떨어지면 밤이면 와서 싣고 나가고."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해 산세가 험하고

바다로의 탈출도 용이해

여순 사건 당시 인민군의 근거지가 됐던 고흥.



주민들은 인민군과 진압대에 차례로 점령당하는

혼돈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들이닥친 인민군은

젊은이들을 불러 '좋은 세상을 만들자'며

사상 교육을 했고,



◀INT▶

"이북 사람들 내려와서 어떻게 하냐면, 정** 씨 집이라고 있어. 커. 거기가. 그 집에 본부를 차려놨어. 나 거기는 한 번도 안 갔어. 처녀, 총각들 데려다 놓고 거기에서 교육 시키고 그러더라고."



6.25 이후에는 고흥을 탈환한 진압대가

협력자를 가려낸다며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INT▶

"회의를 하는데 거기에 참석만 했다고 6.25 터졌을 때 여순사건 관련됐다고, 빵 해버려. 진압대 내려왔을 때. 그래서 많이 죽었지."



송병섭 씨가 살았던 포두면 안동마을은

다행히 인민군으로부터 경찰서장의 아내를

보호해준 공로로 화를 피했습니다.



◀INT▶

"다른 동네는 무지하게 두들겨 맞았어. 근데 우리 마을은 소홀하게 했어. 조벼락 마누라 하나 도와줬다고. 여기가 마루가 있어. 여기서 살았어. 조벼락 마누라가."



하지만 전동 마을과 봉림 마을 등

인근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 나갔습니다.



◀INT▶

"해가 5시경이나 됐을까. '땅' 소리가 났는데, 조금 있으니까 울고불고 사람이 가더니 거적에 싸가지고 데리고 왔어. 울고, 피가 그냥.. 길에 쭉 있었지."



화를 피하기 위해

모두 바다로, 산으로 숨어들어

젊은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었습니다.



◀INT▶

"여기 사람들 집에 안 붙어있었어. 젊은 사람들. 노인들이나 있을까."



12살 어린 나이에

경찰서 급사로 일을 시작했던 송병섭 씨는

이웃 마을 형동생들이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얼마 뒤에는 경찰에 쫓겨 도망가는

그들을 검거하는 작전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혼돈의 시기, 격변의 세월을 살았던 기억은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INT▶

"저기 저 노란 거. 노란 나무 하나 서 있지, 중간에. 그쯤 될 거야. 거기에서 도망을 갔어. 죽창 들고 전부 다. 여기서 싸고 저기서 싸고 그랬는데 빠져나가 버렸어. 쌀밥을 해놓고, 소고기 썰어서 볶아 놓고. 여기서 비봉산으로 건너서 마복산에서 팔영산에 가서 그 사람들이 사흘 만에 거기서 총살을 당했거든."



풍파를 겪었던 고흥은

지난 1기 진화위 조사에서

고작 43명의 희생자만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150여 명.



속절없이 나이가 들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이웃들을 보고 있으면,

송 씨 역시 더 늦기 전에 특별법이 제정되어

원혼을 달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INT▶

"나 죽어버리면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을걸. 그거는 해 줘야 맞아, 정부에서. 아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왜 안 해줘."



MBC NEWS 조희원입니다.

◀END▶
조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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